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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마오쩌둥이 무너지면 중국공산당이 무너진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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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18>

현실 정치에서 2인자는 영원히 1인자의 “꼬붕”으로 살아야만 하나? 정치투쟁의 링 위에서 2인자가 1인자를 제치고 권력의 정상으로 올라가기란 쉽지 않다. 2인자는 흔히 1인자를 최고의 영도자로 만든 1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1인자가 무너지는 순간, 2인자는 바로 그 1인자를 옹립한 권력창출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정치판에서도 흔히 “꼬붕”이 “오야붕”에 종속되는 야쿠자의 생존논리가 관철된다.

문제는 1인자의 유고(有故)와 더불어 발생한다. 스탈린 사후 3년 후였다. 1956년 2월 25일,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쇼프는 소련공산당 의회에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비공개 연설문 “인격숭배와 그 영향들”을 낭독한다. 이 연설문이 이스라엘 정보원에 의해 유출되자 거센 후폭풍이 일어난다. 스탈린의 고향 조지아에선 스탈린 추종자들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지만 이른바 “흐루쇼프 해빙”은 헝가리, 폴란드, 불가리아, 체코 등 공산권 전역에 자유화 물결을 일으켰다. 공산주의를 동경하며 스탈린을 칭송해왔던 서방의 좌파 지식인들도 혼란에 빠진다. 일례로 미국공산당은 순식간에 3만 명의 당원을 잃었다.

1957년 볼셰비키 혁명 40주년 기념을 맞아 모스크바에 머물던 마오쩌둥은 ‘홍루몽’의 한 구절을 인용해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를 치하한다. “동풍이 서풍을 압도한다(東風壓倒西風)!” 이 구절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압도하는 의미로 여겨졌지만, 그 숨은 뜻은 중국이 소련을 압도한다는 의미였다. 마오가 “대약진”의 구호를 내걸고 무리한 집산화의 유혹에 빠져든 국제정치의 배경이었다. 스탈린처럼 “격하”되지 않기 위한 마오 최후의 승부수였다.

조선일보

<195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간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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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인자 류사오치, 마오를 거역할 수 없었다

중공중앙 서열 제2위의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꼬붕”이었다. 대약진운동이 대기근으로 귀결된 후에도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2020년 현재까지 중국에선 제대로 “마오 격하 운동”이 일어난 사례가 없다. 마오가 무너지면 중국공산당이 무너지고, 중국공산당의 붕괴는 중공중앙 베테랑 혁명가 모두의 몰락이기 때문이다.

1959년 국가주석의 지위에 오른 류샤오치는 대기근을 수습하고 민생을 챙겨야만 했다. 1962년부터 덩샤오핑과 함께 실용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했지만, 류샤오치는 정치 캠페인을 경시할 수 없었다. 마오가 제창한 사회주의 교육운동(1963-1966)은 류샤오치의 영도 아래 전개되었다. 대기근의 참상을 목도한 후 “역사가 우리를 단죄할 것”이라며 마오쩌둥을 압박했던 류샤오치! 그는 그러나 마오를 거역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었다. 마오가 그를 국가주석에 앉힌 정치적 “오야붕”이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중소분쟁의 결과, 전 중국은 “수정주의 반대!” “반수방수(反修防修,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자!)” 등의 구호로 뒤덮인 상황이었다. 실용적 경제개혁을 추진하던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으로선 자칫하면 수정주의의 멍에를 쓸 수도 있었다. 류샤오치로선 이념적 선명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스스로 수정주의자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확실한 “좌파”만이 “우파”의 방법을 차용할 수 있는 극한(極限) 정치의 아이러니였다.

조선일보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가는 것은 반수방수의 백년대계다!”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을 농촌 벽지에 하방(下放)시키면서 지식청년이라 부른다. 반수방공은 문혁의 대표적 표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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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6월 "숨어있는 우파를 색출해 단죄하라"

1965년 11월부터 1966년 5월 말까지 마오쩌둥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기반을 닦았다. 1966년 6월 9일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항주로 날아가 마오에게 베이징으로 돌아와 달라 간청하지만, 마오는 슬그머니 그 요청을 뿌리친 채 계속 남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쩌둥은 “절대로 계급혁명을 잊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며 전국적인 대중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왔다. 1966년 6월 드디어 대중노선의 광풍이 일어났는데, 혁명의 파도를 보면서도 마오는 입을 다문 채 시간만 끌고 있었다.

1966년 5월 말부터 중앙방송을 비롯한 전국의 모든 언론이 문혁의 바람을 일으키자 전국의 모든 대학에선 대자보의 물결이 일었다. 베이징에서 시작된 문혁의 광풍은 곧 지방에도 몰아쳤다. 6월 첫 주, 상하이에 대자보의 홍수가 일어났다. 상하이 시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처음 며칠 동안 무려 270만 명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6월 18일까지 대략 8만 8000장의 대자보가 붙었고, 1390명이 비판당했다.

6월 초, 7239명의 공작조가 베이징의 교육문화 기관 및 언론사에 파견됐다. 거의 동시에 상하이 역시 40여개 대학에 공작조를 파견했다. 공작조는 대부분 퇴역 장교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1964년 이래 중국공산당 관료조직의 정치부 등에서 민간인으로 근무하던 인물들이었다. 지방의 공작대도 역시 각 지역의 군구(軍區)를 통해서 조직되었다. 중공중앙의 전통에 따라 현장에 투입된 공작조는 표면상 문화혁명을 영도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숨어 있는 우파의 색출 및 단죄가 본래의 임무였다.

그해 6, 7월 언론 지면에는 “반혁명 흑방(黑幇)”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했다. 과연 누가 “반혁명 흑방”에 속하는가? 그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작조는 부르주아 사상을 설파하거나 수정주의의 교수법을 확산한 교사들을 색출해 비판하라 지시했다.

조선일보

<“반당 반사회주의 흑선(흑색 노선)을 향해 맹렬히 불을 지르자!” 문혁 당시의 풍경


◇ 베이징대 총장, 낙서 금지했다가 '반혁명분자'로 찍혀

학생들은 사소한 과거의 언행까지 문제 삼아 대학총장, 대학간부, 교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베이징 대학 총장 루핑은 기숙사벽에 낙서를 금지했다는 이유로 “반혁명 흑방”으로 몰렸다. 벽에 마오주석의 어록을 적고 싶어도 낙서 금지 때문에 적을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혁명의 잣대를 들이대면 모두가 구린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모두가 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공격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균열이 일어났다. 처음엔 기세등등한 당권파의 자녀들이 문혁의 주체로 등장했지만, 이후 당권파가 반동으로 몰리자 그들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조선일보

<반혁명수정주의 분자로 몰려 비투(批鬪)당하는 베이징대학 총장 루핑의 모습


1966년 여름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류샤오치는 문화혁명의 진두지휘를 맡았다. 마오는 대규모 군중운동을 벌일 때마다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했다. 1957년 반우파투쟁은 중앙서기처의 총서기 덩샤오핑의 작품이었고, 이미 언급한대로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류샤오치의 작품이었다. 물론 모든 캠페인의 배후는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황제”의 지위에서 관망할 뿐, 직접 나서지 않았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맡은 바 임무를 확실하게 수행함으로써 마오의 총애를 받았고, 덕분에 그들은 중공중앙 최고위의 당권파가 될 수 있었다. 행정의 실권을 쥐고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도 그들이 마오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1966년 6월 3일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는 문화혁명의 기본원칙 8개 조항을 승인한다.

1. 대자보는 교내에만 붙인다. 2. 집회는 학습 및 공무를 방해할 수 없음. 3. 거리집회 불허 4. 외국인 학생 참여 금지 5. 비판 대상자의 집에서는 비판투쟁 금지 6. 각별한 안전주의 7. 구타 및 부당행위 금지 8. 투쟁의 수위 조절에 적극적 지도 필요

조선일보

<“무산계급 혁명조반파여, 연합하라!” 문혁 당시의 포스터


문혁의 파도가 전국을 뒤엎는데, 마오는 7개월 넘게 지방에 체류하고 있었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공작조를 파견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혁의 계급투쟁을 지휘하려 했지만…. 학생들은 이미 “혁명무죄 조반유리(造反有理)”의 암시를 따라 과격하고도 극렬한 문혁의 계급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공작조와 조반파가 격렬하게 맞붙기 직전이었다. 급기야 1966년 6월 18일 베이징 대학에선 대규모 폭력시위가 발생한다. 그해 여름, 노회한 게릴라 전사 마오의 시나리오대로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 <17회> “혁명의 대상은 관료 최상층, 혼란을 두려워말라”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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