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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사설] 안보 현실과 동떨어진 文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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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적 평화체제 여는 문 될 것”

北을 대화로 이끌어내려는 의도

美 ‘선 비핵화’ 입장과 충돌 우려

세계일보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비핵화와 함께 항구적 평화체제의 길을 여는 문이 될 것”이라며 “종전선언을 통해 화해와 번영의 시대로 전진할 수 있도록 유엔과 국제사회도 힘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남북한과 중국·일본·몽골이 참여하는 ‘동북아시아 방역·보건 협력체’ 구성도 제안했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북한 비핵화를 견인하기 위한 선(先)종전선언 구상을 내비친 것으로, 비핵화 조치를 종전선언 조건으로 삼던 기존 입장과 배치된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이지만, 북·미의 현실과 동떨어진 제안이어서 공허하게 들린다. 무엇보다 미국은 ‘선 비핵화, 후 종전선언’ 입장이 확고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코로나19와 11월 대선에 집중하느라 종전선언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는 형편이다. 이런데도 한·미 간 사전 조율을 거치지 않고 뜬금없이 종전선언을 제안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미국에선 “북한의 핵과 인권, 사이버 범죄 등을 무시한 현실성 없는 허상”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종전선언 제안이 남북, 북·미 대화를 되살리기는커녕 한·미 공조의 틈만 벌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7월 “자위적 핵 억제력으로 하여 우리 국가의 안전과 미래는 영원히 굳건하게 담보될 것”이라고 한 것만 봐도 그렇다. 다음달 10일 노동당 창건일 열병식에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공개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북한 비핵화가 빠진 종전선언은 우리 안보에 큰 구멍을 낼 수 있다. 존립 근거가 사라지는 주한미군의 철수나 감축을 불러올 수 있는 데다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해주는 꼴이 된다.

하노이 북·미회담 결렬 이후 비핵화 시계가 멈춰 선 마당에 종전선언을 먼저 하자는 것은 북한에 내밀 카드 하나를 포기하는 것과 진배없다. ‘동북아시아 방역·보건 협력체’도 메아리가 없는 제안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북한이 우리 정부의 남북 방역협력 제안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데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달 “어떤 외부적 지원도 허용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냉철한 현실 진단 없이 희망적 사고에 기반한 대북정책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정부는 언제까지 뜬구름 잡는 평화 쇼에 매달릴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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