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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확신과 과신] 효율성 위해 목숨을 잃는 대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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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중세 이전 영국에서는 땅에 대한 분쟁 해결이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분쟁 당사자는 대리인을 고용하여 관중 앞에서 싸우도록 했고, 이긴 쪽 주인이 땅을 차지했습니다. 싸움에서 진 대리인은 자주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사법제도는 이러한 분쟁 해결 방식을 허락했습니다.

조지메이슨대학의 경제학자 피터 리슨은 마녀사냥, 동물재판, 배우자 매매와 같은 역사를 경제학의 눈으로 분석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이런 일들이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위한 합리적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리인의 싸움을 통한 토지 분쟁 해결도 효율적인 토지 배분을 가져왔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주된 관심은 분쟁에 놓인 땅이 '누구의 소유여야 하는가'입니다. 땅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할 수는 이가 땅을 소유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결과입니다. 대리인을 통한 싸움이 효율성을 달성하는 것은 마치 경매가 작동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진 주인이 더 싸움을 잘하는 대리인을 고용할 인센티브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을 담은 그의 책은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에게 "흥미롭다" "이치에 맞는다" "매혹적이다" "통찰력으로 가득하다"와 같은 추천사를 받았습니다.

대리인의 목숨값은 효율성 평가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저자, 추천인, 서평을 쓴 경제학자 중 이를 불편하게 느끼거나 부당하다고 지적하는 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인권 보호 수준을 지금의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경제학자의 관심은 인권이 아니라 효율성이기 때문일까요? 저도 너무 궁금합니다.

대리인 보호를 위해 싸움 규칙이나 고용 계약 조건을 엄격하게 바꿀 것을 제안하면, 과연 피터 리슨 같은 경제학자는 무엇이라 답할까요? 이런 식의 '정부 개입'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오면 많은 경제학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땅 주인의 인센티브는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리인 사이의 싸움 결과는 더 이상 효율적인 토지 배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파헤치고 효율성 논리를 제시하는 설명은 흥미롭고, 이치에 맞고, 매혹적이고, 통찰력으로 가득합니다. 동시에 경제학의 거의 유일한 판단 기준인 효율성 개념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도 잘 드러냅니다. 파이의 크기를 키우는 것은 종종 가치 중립적으로 여겨지지만, 효율성 개념도 결코 힘과 권력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효율성은 비록 땅 주인들 사이에서는 중립적일지 모르지만, 땅 주인과 대리인 사이에서는 전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효율성을 위해 목숨을 잃는 대리인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매일 3명의 노동자가 산업 현장에서 사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깔리고, 끼이고, 떨어지고, 부딪힙니다. 한국은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 가장 높은 산업재해 사망률을 보입니다. 중세 영국 지주가 싸움을 더 잘하는 대리인을 고용하려 했다면, 대한민국은 더 싼 임금에 더 위험한 곳에서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노동자를 고용합니다. 검투사 대리인의 죽음은 싸움 실력 부족으로 마무리된다면, 노동자의 죽음은 개인의 부주의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전면에서 발생하는 산재 사망 사고는 슬프고, 이치에 맞지도 않고, 통찰력 있는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택배 노동자들은 인력 충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택배 물량이 늘어나는 시기일 뿐 아니라, 특히 이번 추석에는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올해 들어 7명의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했습니다. 택배 노동자 설문 조사에 따르면 올해 이들의 주간 평균 노동시간은 71.3시간입니다.

[김재수 美인디애나-퍼듀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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