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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매경포럼]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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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가 유행어가 됐지만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든다. 기억을 더듬어 오래전 읽은 소설 한 권을 다시 펼쳤다. 1984다.

『증오주간이 돌아올 때마다 사람들은 반역자 골드스타인의 초상화를 불태우고 수백 장의 유라시아군 포스터를 찢어서 소각했으며 상점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이 정부 들어 '토착왜구'들이 바퀴벌레처럼 출몰하고 있다. 지난 정권 부역자, 탈원전 비판자, 4대강 옹호자, 대북 제재론자, 지소미아 유지론자, 검찰개혁 저항자, 기타 반정부 세력들. 정의의 강물과 반대로 흐르는 역류를 따라 올라가면 이승만과 박정희,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닿는다. 3·1절과 광복절, 바다 건너 일본에서 소음이 들려올 때마다 어김없이 '증오주간'이 발효되고 누군가에게 토착왜구 좌표가 찍히고 군중은 증오에 몸을 떨며 현실의 모순을 잊는다.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와 전쟁 중이다. 군중은 전쟁 포로들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외친다. 절정의 순간 오세아니아는 이스트아시아와 전쟁 중이며 유라시아는 항상 동맹국이었다는 당의 성명이 발표된다. 군중은 유라시아가 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에서 말소한다.』

여권은 오랫동안 반칙·특권과 싸웠다. 촛불혁명 전에는 상대의 작은 불의에도 바르르 떨었고 의혹이 있으면 일단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걸 기억하는 군중이 조국을 장관에 임명하지 말라고, 추미애 장관을 더 봐주기 어렵다고 외치자 당은 '이것은 특권이 아니라 권리다'고 했다. 군중은 새로운 특권 기준에 익숙해지는 한편 과거의 기준을 기억에서 말소하는 중이다.

『유일한 결혼의 목적은 당에 봉사할 아이를 낳도록 하는 데 있었다. 성교는 마치 관장을 하는 것처럼 역겨운 행위로 간주되었다.』

주택담당 장관은 집의 유일한 목적이 몸을 누이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집을 재산증식 수단으로 여기면 공공의 적이다. 더 큰 집, 더 좋은 동네에 대한 열망은 역겨운 속물근성으로 타기되어야 한다. '여러분, 집을 탐하는 것은 타락한 영혼의 증거입니다. 영끌은 특히 나빠요.' 마스크를 쓴 그녀의 눈빛은 작은 일탈마저 잡아내는 기숙사감처럼 번뜩인다.

『풍요부는 4분기 구두 생산량을 1억4500만 켤레로 예상했다. 실제 생산량은 6200만 켤레였다. 이에 예상 생산량을 1억4500만 켤레에서 5700만 켤레로 바꾸었고 이로써 할당량은 초과 달성되었다.』

경제부총리가 서울 집값 하락 사례로 든 것이 알고 보니 가족 간 거래였다. '감정원 공식 통계'를 근거로 이 정부 들어 서울 집값이 11% 올랐다고 주장해온 주택담당 장관은 40% 이상 오른 감정원의 또 다른 통계를 들이밀자 "보고받은 적 없다"고 했다. 통계에는 정의로운 통계와 불의한 통계가 있다. 정부는 정의로운 것을 고를 뿐이다. 더 바람직한 것은 불의한 통계를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것이다. 통계청의 사명이 막중하다.

1984는 은유일 뿐이고 이에 비하면 스탈린조차 온건했다. 대한민국을 1984에 비교하는 것은 농담에 가깝다. 농담이 가능하다는 것이야말로 1984가 아니라는 증거 아니겠나. 다만 4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1984적'이냐고 묻는다면 내 답은 명확하다. 그러고 보니 TV에서 정치풍자 코미디를 본 지도 4년쯤 된 것 같다.

1984 주인공은 '혁명 전에도 삶이 이랬던가?' 하고 자문한다. 달라졌다는 느낌이 있을 뿐 옛날을 증언해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아직 이전의 삶을 기억한다. 증언해줄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시간 앞에 기억이란 믿을 게 못 된다. 처음 겪는 일이 반복되면 일상이 된다. 『당은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한다. 도대체 둘 더하기 둘이 넷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그 비슷한 억지를 자주 듣다보니 내 믿음에 자신이 없어진다. 조금 무서워진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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