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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경제포커스] 미·중 반도체 전쟁, 졸면 우리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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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일 반도체 氣 싸움 중 한국은 양산 기술·공장만 가져

글로벌 공급망 깨지면 무대책 “1위 확고” 방심하지 말아야

조선일보

정성진 산업2부장


1980년대 금요일 저녁 일본 한 반도체 공장. 인근에 미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퇴근한 일본인 기술자들을 태우기 위해서다. 이 버스는 곧바로 인근 국제공항으로 향한다. 비행기는 서울 김포공항에 내린다. 이들은 한국 업체에 반도체 노하우를 전수한 다음 일요일 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구전으로 전설처럼 내려오는 한국 반도체 발전사 한 장면이다.

그런데 비슷한 양상이 요즘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보인다. 중국 반도체 회사들, 디스플레이 회사들이 한국의 인재들을 빼가는 것이다. 심지어 공개 구인 사이트에 버젓이 높은 연봉을 제시하면서 노골적으로 기술자들을 데려가려고 한다.

한국의 반도체 태동기엔 거의 없었고 현재 중국엔 있는 점도 있다. 국가의 개입이다. 중국 정부는 수십조, 수백조원의 돈을 반도체에 쏟아붓고 있다. 특히 최근 중국 언론들은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이 지난 17일 중국과학원을 찾으며 ‘국가팀’이 만들어졌다고 보도했다. 중국과학원은 반도체, 소프트웨어, 통신, 로봇 등을 연구하는 국가 R&D 기관이다. 계기는 지난 15일부터 시작된 미국의 화웨이 제재다.

화웨이는 스마트폰, 통신 장비 등에서 삼성전자에 대적하거나 앞서는 유일한 중국 회사다. 미국은 화웨이에 미국 기술을 쓴 반도체의 납품을 금지했다. 이는 ‘미국 장비에 일본 소재를 넣어서, 한국 공장이 만든 반도체를 중국이 쓴다’는 글로벌 공급망이 무너질 수 있음을 뜻한다.

미국은 반도체 장비에 관한 한 세계에서 따라갈 나라가 없다. 장비를 만들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술도 물론 같이 갖고 있다.

중국은 인구 14억명을 바탕으로 큰 시장을 갖고 있다. 한 해 세계에서 생산되는 반도체의 60%가 중국에서 소비된다. 웬만한 시장에서는 사는 사람이 갑(甲)이고 파는 사람이 을(乙)이다. 중국은 어떻게 해서든 미국에 반격할 것이다.

일본은 소재를 갖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한국을 애먹인 3대 반도체 소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냥 보면 아주 기초적인 화학물질 같지만, 극한의 순도를 가진 불화수소 등은 일본 말고 만드는 곳이 없다.

한국은 양산 기술을 갖고 있다. 장비와 소재를 사와서 경쟁 업체보다 가장 싼값에 압도적으로 낮은 불량률로 반도체를 뽑아낸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75%를 한국 공장이 공급한다.

최종 제품을 만드는 한국은 아킬레스건이 있다. 매년 수십조원을 투자해야 한다. 투자 시기가 시장 수요와 어긋나면 천문학적인 적자를 본다. 벌써 재벌 몇 개가 반도체로 날아갔다.

단기적으로 화웨이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압박이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바짝 뒤를 따르던 화웨이를 따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졌던 통신 장비를 미국 1위 통신 사업자에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요즘 좋아하기는커녕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한다. 왜일까? 독기 품은 중국의 끈질긴 반격이 두려운 것이다. 화웨이의 스마트폰이 망가져도, 샤오미·오포 등이 그 자리를 메울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한국이 최소 2~3년 앞서 있는 메모리 반도체에서도 이를 악물고 추격에 나설 것이다. 중국 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중국 공장의 핵심 근로자를 빼올 수 있다. 성장 가능성이 있는 중국 반도체 기업 한두 곳을 정해 R&D 투자를 10배, 20배로 늘릴 수도 있다.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가 한국 제품 근처까지만 온다면, 지난 20년간 평화롭게 유지해온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이 한국 기업에 엄청난 위기로 돌변할 수 있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시기다. 졸면 죽는다.

[정성진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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