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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문화와 삶] 당연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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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8년 US여자오픈 연장전. 박세리가 양말을 벗고 호수에 들어가 건져낸 것은 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환위기 실의에 빠진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이 문장은 방금 내가 쓴 것이지만 내가 쓴 문장이 아니다. 1998년에 나는 배추벌레를 키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러나 그때 박세리가 만든 ‘18번 홀의 기적’에 대해선 언제 어느 때나 생생한 감격의 어조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장면은 이미 위인 탄생 설화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신 일화와 함께 그가 깨우친 진리에 대해 말했는데 ‘네가 신라 시대에 살아봤냐? 왜 본 것처럼 말하냐?’고 따질 수 없듯이.

경향신문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어린 시절부터 ‘영웅’으로 불리는 것을 견디고 극복해낸 삶은 어떤 것일까? 세상이 여성들에게 그런 타이틀과 인생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궁금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나이에 그런 타이틀에 갇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박세리의 모습을 보면, 왠지 더 많은 어린 여성들을 향해 일찍부터 ‘영웅’이라 불러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커리어에 비례하는 박세리의 재력 때문만은 아니다. 짧은 머리와 편안한 옷차림,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자유로움, 분위기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는 당당함,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선을 넘는 상대를 대하는 단호함까지. 그가 방송에서 보여주는 태도 속에는 오랜 시간 자신을 ‘영웅’이라 여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권위와 높은 자존감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여성 시청자들에게 기존 미디어 속 여성상이 얼마나 위축되고 왜곡되어 있었는지를 체감하게 만든다. 본인이 출전한 게임에서 선수로서 할 일을 다했을 뿐인데도 국민들의 희망이 되었던 1998년도의 박세리가 그랬듯, 2020년의 박세리 역시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여주었을 뿐인데도 그것이 여성들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의 약자성에 통제되지 않고 압도적인 권위를 이용해 ‘나의 당연함’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영웅이 되지 못한 대부분의 약자는 나에게 당연한 것을 주장해도 자꾸만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고, 그러다 결국엔 부당한 것에 쉽게 적응해버리고 만다.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은 사람들을 절규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들은 이 부당함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각성하고, 투쟁하고, 호소하며 많은 사람과 힘을 합치려 한다.

‘왜 운동선수 출신의 여성 예능인은 없을까?’ 박세리의 의문에서 시작된 <노는 언니>는 ‘당연하기에 새로운 여성들’을 말하고 있다. 수영, 펜싱, 골프, 리듬체조, 배구. 다양한 종목의 여성 운동선수들은 연습과 시합 과정에서 겪는 월경 문제와 결혼과 임신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며 ‘왜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지’ 작게 후회하고, 이제라도 이런 말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음에 감사한다. 각자의 필드에서 ‘영웅’으로 불리는 이들 역시, 목소리를 모아야 가능한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당연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코로나 시대의 나는 느슨하게 유지하고 있던 연대의 감각마저 사라져감을 느낀다.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내 몸에 대한 선택권을 지키기 위해, 나보다 더 약한 자를 지키기 위해 내던 확신에 찬 목소리는 이제 마스크 안에서만 힘없이 맴도는 것 같다.

지난 9월18일, 죽기 직전까지 혐오와 차별에 싸웠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사망한 날. 나는 그가 남긴 많은 말 중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골라 적어본다. “목소리 높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는 외로운 목소리가 되지 않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라.”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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