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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기억할 오늘] "트루먼의 클리퍼드가 돼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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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막후 지휘자 클라크 클리퍼드(9.24)
한국일보

냉전의 기점으로 꼽히는 미국의 소련 '봉쇄전략'이 1946년 9월 24일자 당시 대통령 특보 클라크 클리퍼드의 저 보고서로 시작됐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trumanlibrary.g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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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 클리퍼드(Clark Clifford, 1906~1998)는 변호사 출신 미국 정가의 막후 실력자였고, 그 인맥과 영향력으로 기업에 봉사한 로비스트였지만 냉전의 실질적 지휘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해리 트루먼의 시작서부터 지미 카터의 재임 마지막까지 민주당 대통령들의 주요 결정 뒤에 그가 있었다.

클리퍼드는 전쟁 중 급사한 루스벨트의 후임으로 부통령 82일 만에 대통령이 된 트루먼의 특별보좌관으로 워싱턴 정가에 등장했다. 당시 트루먼의 처지는, 조금 과장하자면 미국 드라마 '지정 생존자'의 그것과 흡사했다. 모든 각료와 외교 정보 라인이 전임자의 것이었고, 그에겐 다급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하지만 클리퍼드가 있었다. 냉전의 기점 중 하나로 꼽히는 트루먼의 이른바 '소련 봉쇄 전략'은 국무부 조지 캐넌의 작품이지만, 좌고우면하던 대통령의 등을 떠민 게 그였다.(사진 참조.)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설립과 마셜 플랜, 트루먼의 복지(Fair Deal) 정책, 마셜 국무장관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스라엘 건국 승인을 적극 지지했다.

평범한 변호사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1944년 만 37세에 자원 입대해 대통령 특보의 보좌관을 거쳐 1946년 대통령 특보가 됐다. 1948년 기적의 역전승이라 불리는 트루먼의 재선 선거를 지휘한 이래 모두 11차례 민주당 대선 기획단에서 활약했다. 그의 공직 이력은 트루먼 특보 4년과 후임 아이젠하워(공화당)의 국방장관 10개월이 전부지만, 연방대법관과 수많은 장관ㆍ대사직을 모두 고사했다. 대신 특사나 자문관으로, 쿠바 위기와 키프로스 분쟁, 아프간ㆍ파나마 분쟁의 막후에서 활약했다. 당선 직후 존슨이 가장 먼저 찾은 게 그였고, 카터가 특보를 임명하며 "트루먼의 클리퍼드 같은 사람이 돼 달라"고 주문했다는 일화도 있다.

말년의 그는 불법 회계 조작으로 1991년 파산한 국제상업신용은행(BCCI) 스캔들에 연루됐지만 극구 부인했고, 건강 등 사유로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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