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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서경식 칼럼] 먼 길-다시 알렉시예비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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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늘 ‘선한 쪽’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벨라루스에도, 세계 각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만일 그 사람들이 절멸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희망 그 자체의 절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왜 당신들은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러시아 인텔리겐차’에게만 던져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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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또다시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현관 벨을 누르고 있다….”

지난 9월11일 일본 펜클럽에서 발표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긴급 메시지’는 이 한 줄로 끝맺고 있다. 얼마나 고독하고 두려운 일인가. 나는 난처한 듯한 미소를 떠올리면서도 늘 수심에 차 있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린다. 자신이 인터뷰한 수백명의 ‘작은 사람들’(서민)이 그랬듯이 그녀 자신이 끝없이 이어지는 고난과 고뇌 속에 있는 것이다.

나와 그녀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두번, 텔레비전 프로 때문에 대담을 했다. 첫번째는 2000년, 타이틀은 “파멸의 20세기―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서경식”. 두번째는 그녀의 노벨상 수상 이듬해인 2016년이다.(“마음의 시대―‘작은 사람들’의 소리를 찾아서”) 그때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재난지역을 함께 걸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에 이 칼럼난에서 쓴 적이 있다.(“알렉시예비치”, 2016년 12월30일)

2016년에 대담할 때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열중하다 약 먹는 시간을 놓친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대화를 중단하고 휴식을 취했다. 몹시 지쳤고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문을 지금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두드리고 있다. 나는 만년을 나치의 압박과 감시 아래서 보내다가 나치 독일 항복 직전에 고독하게 병사한 여성 예술가 케테 콜비츠를 연상하기도 했다.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지금은 벨라루스 펜클럽 회장이고 루카셴코 정권을 비판하다가 탄압받고 국외로 피신한 야당 후보자와 시민단체 대표들이 설립한 ‘조정 평의회’라는 조직의 간부이기도 하다. 9월9일 발표된 그녀의 ‘긴급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와 생각을 함께하는 벗들은 ‘조정 평의회’의 간부회에는 이미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모두 옥중에 있든지, 국외로 쫓겨났다. 오늘은 마지막 한 사람 막심 즈나크가 체포당했다. 처음에 우리나라가 탈취당했다. 지금은 우리의 가장 좋은 사람들을 강탈당하고 있다. 하지만 강제로 빼앗긴 동료 대신에 다른 몇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들고일어선 것은 ‘조정 평의회’가 아니다. 나라가 들고일어선 것이다….”

벨라루스는 러시아와 유럽연합(EU) 국가들 사이에 있는데, 1994년 이래 26년간이나 루카셴코 대통령의 강권통치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체르노빌의 목소리>도 국내 출판을 중지당하는 등 언론·표현이나 사상·양심의 자유도 제한당해 왔다.

루카셴코는 1994년에 처음 당선됐고, 1996년에는 임기를 연장했으며, 2001년에 재선, 2004년에는 헌법의 3선 금지 조항을 삭제한 뒤 2006년, 2010년, 2015년에 당선됐고 2020년에 6선을 달성했다. <세컨드핸드 타임>에서 알렉시예비치가 쓴 것은 2010년 선거 때 부정선거 반대운동을 벌이다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모욕하는 폭력이나 학대를 당한 젊은 여성의 증언이다.

2020년 8월9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루카셴코의 6선을 인정했으나 부정선거임을 호소하는 시민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8월10일에는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다. 루카셴코 당선에 항의하는 참가자 10만명대의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루카셴코는 9월14일 러시아 소치로 날아가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다시 푸틴의 지지를 얻어냈다.

여기에 쓴 벨라루스의 현대사에 한국 시민들 다수는 일종의 데자뷔(기시감)를 느끼지 않을까. 한국 사회도 아직 저 군사독재시대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눈을 세계로 돌리면 바로 지금 그런 악몽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벨라루스만이 아니다. 신형 코로나바이러스의 만연 속에 세계 각지에서 정치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이 휘몰아치고 있다. 우리 인류는 여기서 길을 잘못 들면 또다시 폭력의 시대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

알렉시예비치는 중세부터 제정(帝政)시대, 사회주의 혁명과 그 이후,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의 ‘작은 사람들’(민중)의 기나긴 고뇌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것도 높은 곳에서 공식이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모순에 가득 찬 민중의 본래 목소리 그대로의 이야기다.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가 우랄산맥을 넘어가면 눈 아래에 평탄한 숲의 바다(樹海·수해)가 펼쳐진다. 그녀의 저작을 읽으면 나는 그 수해가 눈에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끝없는 고뇌의 수해다. 20세기만 해도 그곳은 독일-소련 전쟁의 주전장이어서 마을들은 불타고 무수한 사람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유대인 주민에 대한 학살도 있었다. 역사가 티머시 스나이더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펼쳐져 있는, 북으로 발트 제국에서 남으로는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블러드랜즈’(bloodlands·유혈지대)라고 명명했다. 거기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알렉시예비치의 저작에는 그런 사람들의 소리가 ‘이래도 그럴 거냐’라고나 하듯 가득 차 있다.

2016년의 대담이 끝나갈 무렵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당신이라는 사람에게 경외심(畏怖·외포)을 느끼는 것은 ‘그래도 믿는다. 100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계속 바랄 것이다’라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컨드핸드의 시대에는 예전과 같은 이념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 또는 힘만이 진실인 상황이 러시아에서도,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할 것’이라고 당신이 얘기한 그 확신의 근거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요.”

그녀는 말을 고른 뒤 대답했다.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먼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자신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작은 일을 해야 하고 선한 쪽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말을 충분히 납득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래도 늘 ‘선한 쪽’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벨라루스에도, 세계 각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만일 그 사람들이 절멸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희망 그 자체의 절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알렉시예비치의 메시지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나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차―오랜 관습에 따라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왜 당신들은 침묵하고 있는가? 지원의 소리가 좀체 들려오지 않는다. 작은, 긍지 높은 국민이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고도 왜 침묵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도 당신들의 형제인데. 우리 국민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한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라고.”

“왜 당신들은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러시아 인텔리겐차’에게만 던져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한겨레

서경식 ㅣ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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