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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비무장 우리국민 北 사살에도... 軍은 38시간 동안 입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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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4일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 해상에 정박된 실종 공무원이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 모습.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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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서해 소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실종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A(47)씨에게 총격을 가한 뒤 기름을 부어 해상에서 시신을 불태웠다. A씨가 사망한 것은 지난 22일 오후 9시 40분이고, 군 당국이 사건을 발표한 것은 24일 오전 11시다. 군이 38시간 동안 함구했다는 얘기다. A씨 실종 사실을 정부가 인지한 지난 21일 오전 11시 30분을 기준으로 하면 72시간 동안 군이 침묵을 지켰다는 얘기가 된다.

군 당국은 23일 자정께 청와대에 사건을 보고했고, 이어 1, 2시간 사이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관계장관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대면 보고를 받은 것은 23일 오전 9시였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군의 소극적 현장 대처와 늑장 발표, 문 대통령에 대한 보고 지연 등이 '안보 허점'을 노출했다는 지적이 무성하다.

국방부는 24일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만행에 대한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음을 엄중히 경고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방부가 ‘북한의 만행'이란 표현을 쓴 것은 이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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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호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이 24일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연평도 인근 실종 공무원 북한 피격 사건 관련 보고를 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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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때문? 총격 후 20분 만에 해상에서 시신 태워


군 당국이 북측 해상에서 A씨로 추정되는 인물을 최초 발견한 시점은 22일 오후 4시 30분쯤이다. 그로부터 약 한시간 전에 북한 수상사업소 선박이 황해도 등산곶 인근 해상에서 A씨와 접촉하는 장면이 군 정보망에 포착됐다. A씨는 어업지도선을 타고 근무하던 21일 오전 11시 30분경 실종돼 해경과 해수부가 일대를 수색했다.

22일 오후 A씨는 구명조끼를 입고 부유물에 의지해 기진맥진한 상태로 바다에 떠 있었다. 북한군이 선박을 타고 A씨에게 접근해 대화를 나눴다. 북한군은 방독면을 쓴 채였다. A씨가 이 때 월북 의사를 밝힌 것으로 군 당국은 파악하고 있지만, 북한군은 A씨를 바다에 두고 돌아갔다.

북한은 A씨를 살려두지 않았다. 6시간 만인 오후 9시 40분쯤 단속정을 타고 나타난 북한군이 A씨에게 총격을 가했다. 20분 후엔 A씨 시신에 다시 접근해 기름을 부어 불태웠다. 24일 국회 국방위원회 긴급현안질의에 출석한 서욱 국방부 장관은 "(우리 군 당국에 포착된 불빛이) 40분 동안 보였다"며 "시신은 해역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군 관계자는 “북한군 단속정이 지휘 계통에 따라 상부 지시로 사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사격은 의도적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우발적 총격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북한이 비무장 상태인 A씨를 사살하고 시신까지 불태운 이유에 대해선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조치였다는 분석과 남북 관계를 의도적으로 경색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관측이 엇갈린다. A씨에게 총격을 가한 북한군은 당시 방호복과 방독면을 착용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지난달 "국경 1㎞ 접근 땐 사람이든 가축이든 무조건 사살하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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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욱 국방부 장관이 24일 국회에서 연평도 인근 실종 공무원 북한 피격 사건 관련 긴급현안보고를 위해 열린 국방위 전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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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 사망했는데도 '실종'으로 발표


군 당국이 A씨 피살 정황을 파악한 것은 22일 오후 10시 11분. 서욱 국방부 장관과 청와대에 즉각 보고했다. 그러나 23일 내내 정부의 발표나 공식 대응은 없었다. 23일 오후 11시 연합뉴스의 A씨 사망 보도가 나오고 나서야 국방부는 해당 사건 발생 사실을 인정했다. 국방부의 공식 발표는 24일 오전 11시로, A씨가 사망한 지 38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군이 축소 발표를 했다는 의혹도 짙다. 군 당국은 23일 오후 1시 30분에 "21일 소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A씨가 실종됐고 22일 오후 북한 해역에서 발견된 정황이 포착됐다"는 사실만 공개했다. 이 때는 군 당국이 A씨의 사망을 인지하고 있을 때였다. ‘피격 사건’을 ‘실종사건’으로 은폐 축소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지점이다.

서 장관은 국방위에서 현장 대응과 발표가 모두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북한이 이렇게 천인공노할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발표를 위해) 정보를 분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한반도 종전 선언을 공식화한 23일 새벽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총회 화상 기조 연설에 '찬물'을 끼얹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발표를 늦춘 것 아니냐는 논란도 일고 있다.

군 감시망이 실종된 A씨를 찾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A씨의 월북과 피격 정황을 포착한 것은 군 감시장비가 아니라 시긴트(SIGINTㆍ신호정보) 첩보자산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평부대 감시장비는 22일 오후 10시까지도 A씨의 월북을 추정할 만한 이상 징후를 포착하지 못했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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