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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이강엽의고전나들이] 산 서생과 죽은 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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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옛날, 만년 서생으로 살던 이가 있었다. 늙도록 벼슬을 못하여 불평으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떤 이가 와서 말했다. “당신 같은 재량과 기예를 가지고도 늙도록 뜻을 못 이루었으니 차라리 죽고 싶단 생각이 왜 없겠소?” 그러자 서생은 발끈 성을 냈다. “이게 무슨 말이오? 만일 지금 여기 어떤 사람이 죽은 정승을 싣고 와서 살아있는 나를 사려 한다 칩시다. 그러면 내가 허락할 것 같소? 이게 무슨 말이오? 내가 왜 죽을 생각을 한단 말이오?”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 있는 이야기고 보면 우스개가 분명하다. 정승과 서생은 하늘과 땅 차이다. 역적이 되어 임금이 될 생각이 없는 바에야, 정승이야말로 서생으로서 평생 다다를 수 있는 최고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정승도 죽었다면 이미 이승에서의 삶이 끝이다. 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린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언은 그래서 나왔을 터이다.

그런데 이런 비교를 꼭 ‘삶과 죽음’ 같은 극단적인 데서만 찾을 필요가 없다. 언젠가 다른 대학의 젊은 교수 한 사람이 내게 하소연한 일이 있다. 같은 과 원로교수가 얼마나 고약하게 구는지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교수생활을 조금 해본 이라면 무슨 일인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일이었다. 일단 그 마음을 다친 교수가 더 마음 상하지 않게 다독인 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그 교수가 대단한 힘을 가진 것 같겠지만, 그 교수 입장에서라면 모르긴 해도 한창때인 교수님을 제일 부러워할 걸요, 아마.” 다행히 그 젊은 교수는 말뜻을 헤아리고 이내 얼굴에서 어두운 빛을 거둬냈다.

무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 것보다 낫다 싶은 남의 것을 넘보느라 정작 귀중한 내 것을 놓치고 사는 일이 많아진 듯하다. ‘서생’에 방점을 찍을지 ‘살아있음’에 방점을 찍을지는 각자가 정할 일이지만, 건강하게 살아있는 동안 즐길 일이 훨씬 더 많은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즐길 일만 그런 게 아니라, 감사할 일도, 반성할 일도, 심지어는 폼 나게 복수할 일도 똑같다. 과거에 급제할 만한 재주가 없거나 재주가 있어도 세상이 몰라주는 현실은 분명 불행이요, 불운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가치가 있음을 알아채는 순간, 행운이 벌써 알고 제 몸에 바싹 다가붙는지도 모르겠다.

이강엽 대구교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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