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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매경의 창] 양심과 청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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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우리나라는 양반만이 특권을 누리던 신분제 사회, 그리고 이 체제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던 유교이데올로기를 내던져버리고 각자가 골고루 누리는 자유와 권리를 체제의 출발점으로 한다. 모든 정치적 권력은 국민의 의사에서 나오고 정권은 일시적으로 이를 위탁받은 데 불과하다. 이러한 근본원리의 전면적 변화는 그 자체로 가히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혁명의 도상에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의식할 필요가 있다. 효와 충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사회에서는 가족, 그리고 국가 기타 집단을 개인보다 훨씬 앞세우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직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가령 무슨 일로 불이익을 당하면 상대방의 부모를 찾아가 해결을 구하면서 "자식을 잘못 둔 것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식으로 압력을 가한다. 또 부부 중 한편이 빚을 져서 갚지 못하면 채권자들은 다른 한편을 찾아가서 옥죈다. 그러면 견디다 못한 부모나 부부는 속절없이 책임을 떠안거나 거죽으로라도 의절 또는 이혼하여 이제 남이 되었다는 것을 방패로 삼는다. 나는 이러한 양상이 모두 우리 혁명의 이념에 반하는 연좌제적 발상의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월북했다고, 심지어는 납북되었다고 자식이 공무원 임명 기타 취직 등에서 배척되는 연좌제만 있는 게 아니다.

이와 같이 개인 그리고 독립된 주체의 자유를 좌표의 원점으로 삼지 않고 사람을 무엇보다도 어떤 집안 또는 가문의 누구,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 파악하는 사회에서는 결국 일이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에 귀착된다. 대체로 우리는 '좋은 사람'이라면 남의 간절한 희망은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들어준다고 믿는다. 그가 가까운 관계에 있을수록 더욱 그러하다.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 세운 객관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좋은 사람', 즉 남의 간절한 희망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훨씬 낫고, 웃질이다. 어느 글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위증사건의 인구 10만명당 건수가 일본보다 무려 15배가량 많다고 하는데, 그것이 위와 같은 '관계의 문법'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는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부탁 또는 청탁이라는 것이 넘쳐난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잘 되면 청탁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지니, 결국 혈연·지연·학연 등을 끈질기게 좇아간다. 예를 들면 변호사 선임도 수사하는 검사, 재판하는 판사와 지연·학연 등으로 가까운 사람을 찾아간다. 더 넓게 보면, 이러한 사회의 기본적 문법으로부터 호남이니 영남이니 하는 지역 갈등도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렇게 청탁을 할 만한 관계 또는 '연(緣)'을 가지지 못한 사람, 나아가 그러한 관계에 있는 이를 '살 만한'―"변호사를 산다"는 흔한 표현은 참으로 절묘하다―돈도 없는 사람은 이 사회를 원망하고 분노하게 되지 않을까?

재판 말이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우리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정하고 있다. 여기서 양심이란 물론 법관이 독자적인 인격체로서 가지는 객관적 양심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남에게서 '사람 좋다'는 말을 듣는 것 또는 자신을 그 자리에 놓아준 사람의 뜻을 법적 판단의 암묵적 기준으로 삼는 법관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을 애초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혁명이념은 독립된 개인을 사회 운영의 원점에 놓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신이 그 달성의 주체가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그러한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같은 사회에서 공존하려면 자신의 욕구를 다스리는 일정한 도덕률이 필요하다. 아직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혁명을 끌고 갈 수 있는 새로운 인간, 즉 '양심 있는 개인'으로 거듭 나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양창수 한양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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