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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일사일언] 상처 주지 않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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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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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기간 부모님 몰래 TV 앞으로 가 ‘웃으면 복이와요’를 틀고 키득거릴 때만 해도 이를 업으로 삼게 될 줄 몰랐다.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웃기는 법’을 차근차근 공부해 코미디의 대가로 우뚝 섰을 텐데. 방송사 들어와 편집본을 내밀었을 때 선배들은 “더 웃기게 좀!”이라 핀잔을 줄 뿐 노하우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저 감대로 해오라는 주문뿐. '감'은 참 막막한 단어였다. 내게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고, 있다 해도 도통 꺼내 쓰는 법을 알 길이 없었다.

조선일보

방현영·티캐스트 '노는 언니' CP


코미디는 진정 공식화할 수 없는 직관의 영역일까? 사람들은 왜 웃을까. 허를 찔리는 유머 앞에서 대중들은 약속한 듯 폭소를 터뜨렸다. 어떻게 한 포인트에서 수십 수백의 관중이 동시에 웃는 걸까. 슬랩스틱에서 출발한 코미디의 뿌리를 살펴 보면 대부분의 펀치 라인은 상대나 상황, 혹은 자신을 때리는 곳에서 발생했다. 때려서 넘어지거나 무너지며 뜻밖의 붕괴가 일어나는 곳에서 농담이 완성됐다. 독설은 에둘러 가는 말을 생략하고 삶의 핵심을 찌르는 시원함을 안겼다. 좀 더 웃긴 대본, 자막을 구현하기 위해 콘텐츠는 독하고 못돼졌다. 악마의 편집이란 말이 등장했다.

그런데 최근 방송가의 웃음 포인트가 심상치 않게 변화하고 있다. 독설을 일삼는 빌런에 반기를 드는 ‘불편러’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수년 전 흥행한 시트콤이나 예능들을 다시 보면 불편한 부분들이 생겨났다. 박력 있는 고백으로 여겨지던 장면은 데이트 폭력이 됐고, 바보 흉내나 흑인 분장은 장애나 인종을 소재로 한 부적절한 주제다. 외모 비하나 특정 직업에 대한 희화화도 신중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사생활에 대한 감수성도 요구된다. 상처주지 않는 웃음을 위해 어느 때보다 예민한 '감'이 필요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남 웃기는 일이 이렇게나 어렵다.

[방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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