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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한국식 정의론’ 한발 더 내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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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의로운 시민을 위한 한국의 정의론’

대한민국 헌법·법·판례 속에서 우리 사회에 적합한 정의론 확립하려는 노력


한겨레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 헌법에 담긴 정의와 공정의 문법

김도균 지음/아카넷·1만8000원

오늘날 각자의 ‘정의관’이 쟁투를 벌이는 한국 사회 한가운데 묵직한 질문이 던져졌다.

“정의의 적은 불의가 아니라 ‘또 다른 정의’라는 세간의 냉소에 적절히 응답할 정의관을 우리는 확보할 수 있을까? 정의의 문제에 관해 토론하고 논쟁을 벌일 때 길잡이가 될 일종의 ‘정의와 공정의 문법’(a grammar of justice and fairness)’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은 앞으로 논리정연하게 펼치려는 답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도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새 책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 헌법에 담긴 정의와 공정의 문법>에서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정의의 원칙을 밝혔다. 23일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정의를 둘러싼 공적 논쟁과 담론에서 시민들이 자신의 관점과 입장과 소망을 개진할 때 이 정의의 문법이 마치 레고 조각처럼 일종의 모듈로 활용되어, 정의 담론이 보다 합리적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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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의 ‘정의의 여신상’.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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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출된 복잡한 정의론들을 일목요연하게, 우리 실정과 고민을 고려하고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정교하게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정의관’을 만드는 길라잡이이자 정의로운 시민들을 위한 안내서 구실을 하는 셈이다. 먼저 1부에서 정의의 근본 개념과 역할을 검토하고 한국 사회의 정의 관념에서 4가지 정의 원칙(응분 원칙, 필요 원칙, 계약자유 원칙, 평등 원칙)들을 끌어낸다. 2부는 우리 헌법이 무엇을 정의라 일컫는지, 그리고 헌법에 담긴 자유·존엄·평등의 이상과 기회균등의 원리가 어떤 모습인지 밝힌다. 헌법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해석하며 정의에 관한 논의를 심화한다.

왜 공정과 정의인가? 헌법인가?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와 세계적 법철학자이자 실천적 지식인인 로널드 드워킨 등을 포함해 동서고금 학자들의 방대한 정의론을 천착해온 김 교수는 “1980년 ‘5공 정권’의 정당 명칭이 민주정의당(민정당)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고 도대체 민주와 정의를 무단히 참칭해도 되는 것일까, 분노와 의문에서 ‘정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답했다. 또한 “법학을 공부하면서 법은 정의를 지향하고 실현하려는 기술(기예)이라는 점을 배웠지만 정작 정의가 무엇인지 설명이 부족하여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고 덧붙였다.

지은이는 ‘정의의 기본문제’를 “각자에게 이익과 부담을 분배하고 재화를 나누는 문제”라고 요약한다. 정의는 분쟁을 ‘만인 대 만인의 무력 투쟁’이 아닌 ‘공통의 규범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협동을 이끌어내는 데 필수적인 덕목’이다. 정의와 함께 책의 열쇳말을 이루는 ‘공정’ 역시 중요하다. 정의로움이나 공정성은 분배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의’의 실마리를 찾는가? 지은이는 “우리나라 헌법에는 동학혁명 등에서 발원하고 3·1혁명으로 분출한 사회적 평등의 실현을 우리 사회의 기본구조로 제도화한다는 전통이 견지되어 왔다”고 답했다. 서구의 정의론을 우리 사회에 곧바로 적용하기보다 우리 헌법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비록 한계가 있을지라도 거기에는 지배와 억압의 사회적 관계, 즉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처방전이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우리가 당대 문제에 직면해 어렵게 공동으로 지키고 일구어온 헌법과 법률, 헌법재판소와 사법부의 판례에 담긴 정의관을 발굴하자는 문제의식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때론 좌절하고 때론 한계가 있었던 우리 사회의 정의관을 서구 중심으로 발전한 인류사 속 정의론에 비추어 “최선의 작품으로 만들어 나가보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겨레

아이리스 매리언 영. 출처 위키피디아


재화분배 이상의 정의관

책을 보면, 현대의 정의관은 두 가지 흐름이다. 하나는 평등을 정의의 핵심으로 보면서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평등주의적 정의관’, 또 하나는 반대로 개인의 자유나 효율성을 지향하는 ‘반평등주의적 정의관’이다. 전자는 존 롤스의 정의론이 대표적이고 반평등주의적 정의관은 노직이나 하이에크가 대표 주자다.

책은 ‘중요한 자유들의 평등 보장’을 목표로 하는 평등주의적 정의관을 집중적으로 다루는데, 이는 균등분배나 균등대우를 넘어 단순한 물질적 재화 분배정의 이상을 의미한다. 이런 정의관은 평등한 시민의 지위를 위협하는 불평등의 격차를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데 목표를 두게 된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사회적 부정의’를 다섯가지 양상으로 나눈다. ①착취 ②노동시장 등에서의 주변화 ③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무권력화 ④옳고 그름이나 표준·정상을 판가름하는 문화권력을 독점하는 문화제국주의 ⑤일상적 상호작용에서 합당한 이유도 없이 벌어지는 무차별적 폭력이다. 이 다섯가지 판별 기준이 있으면 다양한 ‘사회적 부정의’를 단 하나의 척도로 환원하지 않고도 각각의 집단이 얼마나 심한 부정의 상태에 놓여 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정의의 문법’인 셈이다.

이에 ‘#미투 운동’을 적용하면, 물질적 재화 분배정의 이상의 운동으로서 ‘미투 서사’의 핵심에는 직장 등 일상생활에서의 부당한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강간, 성폭력, 성희롱 피해자들의 진술과 증언에 대한 조롱과 의심이 있었다. 이때 나타나는 ‘인지적 부정의’는 남성중심적 법문화, 고통을 적절하게 표현할 언어가 부재한 문제도 포함한다. ‘성희롱’ ‘성적 괴롭힘’ ‘감정노동’ 같은 개념을 고안하여 피해자가 겪는 고통을 사회구성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지적 자원을 발굴·공유하는 것도 단순한 재화의 분배를 넘어선 ‘정의의 과제’가 되는 것이다.

한겨레

로널드 드워킨. 출처 위키피디아


정의론으로 보는 사회

지은이는 실질적 사회정의의 원칙들을 응분 원칙(응분의 몫에 따른 배분), 필요 원칙(존엄에 따른 필요 보장), 선택 원칙(선택의 자유 존중), 균분 원칙(평등분배·평등대우)으로 나눈다. 하지만 이 원칙들은 충돌할 수 있다. 플루트가 있을 때, 가난한 아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 플루트를 만든 아이 중 누구에게 주어야 할까? 지은이는 원칙의 충돌을 조정할 상위 가치가 있다고 보며, 이를 ‘사회적 평등’과 ‘관계의 평등’이라고 밝힌다. 이는 기계적 평등을 넘어선 지향으로, 전태일 열사의 경우에서 보듯 ‘부스러기의 외침’ 또한 ‘목소리’로 존중돼야 한다는 뜻과도 통한다.

평등 원칙은 균분 원칙으로 환원하거나 축소해선 안 된다. 이를테면 코로나19 시대의 마스크나 보호장비 등이 불충분한 상황에서 필수품을 배분할 때는 최약자의 필요를 우선시하면서도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분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본소득 논의에 적용하면, 무조건적 기본소득보다 ‘기본적 필요 원칙’과 평등한 시민으로서 역량 계발의 기회를 주는 ‘기본적 역량 증진 원칙’에 기반한 사회복지의 제공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고 설명한다.

책은 헌법 제10조(인간 존엄)와 제11조(평등)를 집중 분석한 결과, 우리 헌법 속에 ‘시민의 사회적 존엄을 보장한다’는 정의 원리가 관통하고 있음을 밝힌다. 헌법에서 평등은 단순한 균등 대우가 아니라 ‘사회적 불의와 폐습’을 극복한 사회적 평등의 실현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특히 ‘응분 원칙’에 입각한 기회균등을 분배정의의 원칙으로 삼는 문제를 꼼꼼히 살핀다. 가장 중요하게는, 개인적 노력과 탁월한 성취가 진정 존중되는 사회가 되려면 ‘공정한 기회균등의 배경’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적 불평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절차적 공정성만 중시한다면 적잖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기회균등의 이상과 결합되려면 절차적 공정성과 경쟁 단계에서의 차별금지라는 두가지 요건 이외에 필요한 것이 있다. (…) 필요한 자격요건(능력이나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재능을 발달시킬 기회가 누구에게나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병목’ 또한 중요한 현상이다. 단 한번의 결정적 시험으로 미래가 결정되는 ‘대 시험 사회’에 관해 지은이는 이메일에서 “관문인 병목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려고 수많은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고생하는 사회, 그러나 그중 극히 일부만 기회의 땅과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라고 설명했다. “이번 공공의대, 의사 파업 사태는 병목사회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 “능력주의와 절차적 공정성에만 매몰되면 ‘병목사회’의 틀 안에서 ‘신-신분제 사회’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20대 80의 사회처럼 능력과 신분이 ‘세습사회’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한, 개인이 정의롭고 공정하게 행동하는 일이 결국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고 우려하며 “무엇보다 먼저 사회의 ‘기본구조 정의’가 확보되어야 함을 강조한 존 롤스의 견해를 실감하는 요즘”이라고 했다. 이후 연구방향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헌법, 법, 판례 이외에도 우리 시민이 공적으로 축적해 온 ‘공적 정치 문화와 가치들’이 분명히 있다. 앞으로 이를 발굴하고 해석하여 우리 사회에 적합한 정의‘론’들을 확립해가고 축적해가는 것, 그래서 인류 공영의 정의론 보고(寶庫)에 기여하는 것. 이것이 소원이다. 코로나 방역 모델로 한국의 사례가 꼽히듯이.”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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