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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취약함은 결함 아닌 공동체의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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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2005년부터 최근까지 쓴 글 책으로 발간

자본과 결탁해 ‘과전류’된 과학· ‘시행되지 않은 연구’의 문제 짚어


한겨레

신영전 교수는 “송파 세 모녀 사건의 핵심에는 질병과 장애, 높은 의료비가 자리하고 있었다”며 가장 약해서 가장 먼저 죽는 이들은 ‘아프면 제일 먼저 붓는 편도’이자 ‘인류 생존의 해법을 간직한 이들’이라고 했다. 사진은 송파 세 모녀 6주기를 맞아 서울 광화문에서 진행된 추모제 모습.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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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즈만이 희망이다

신영전 지음/한겨레출판·1만6000원

“한국 의사 사회는 우리나라가 의료보장 제도를 시작할 때 관행 수가의 55%에 불과한 낮은 수가를 채택한 것이 모든 문제의 원죄라고 이야기한다. 이 주장은 의사 사회 내에서 서로 인용되면서 강화되어 ‘절대 진리’가 되었다.”

지난여름 ‘전공의 파업 사태’에 대한 진단이 아니다. 꼭 3년 전인 2017년 의료계의 건강보험 개편안 반대 시위를 바라보며 쓴 글이다. <퓨즈만이 희망이다>는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가 지난 15년간 언론과 학술지에 기고한 글을 모아 낸 칼럼집이다. 2005년부터 최근까지 쓴 글을 다듬고 자본·희망 등 8가지 키워드로 분류해 이어 붙였는데, 과거에 쓴 글이 적지 않음에도 완성된 조각보의 색감이 바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보건의료 정책에 관한 한 우리 사회가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어서다.

한겨레

지은이의 시선은 “죽어서야 겨우 신문의 몇 줄을 차지할 수 있었던” 청도 대남병원 폐쇄병동 코로나19 사망자들부터 2014년 ‘송파 세 모녀’까지 우리 사회 가장 취약한 계층에 오래 머무른다. 그는 이들을 ‘퓨즈’라고 칭한다. 퓨즈는 과전류가 흐르면 제일 먼저 끊어져 전기장치를 보호하고 합선으로 인한 화재를 방지하는 장치. 가장 연약하지만 바로 그 약함 덕분에 사회에 흐르는 과전류를 가장 빨리 감지하고 이를 통해 사회 전체를 보호할 수 있는 강한 존재다. “이런 약자들이야말로 현재의 모순을 가장 농축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존재이기에 그들에게 답을 물어야 한다.”

지은이가 ‘과전류’로 꼽는 것은 “자본과 결탁한 고삐 풀린 과학”이다. 지은이는 그 예로 영리 유전자 연구검사 사업을 든다. “(이 사업은) 일반인들의 오해를 야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암 유전자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암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영리 검사 기관들이 자주 인용하는 배우 앤젤리나 졸리에게 있었던 ‘유방암 유전자(BRCA1)’를 가진 유방암 환자는 전체의 5%밖에 되지 않는다.” 유전자 검사 오남용이 환자에게 극심한 공포를 유발하고 의료비를 부풀리는 문제점을 지적한 그는, 이어지는 글에서는 대통령 직속 국가 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을 그만두겠다고 밝히며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와 규제샌드박스법이 이 모든 일의 발단입니다. (…) 무리한 속도전은 그 폐해가 막심합니다. ‘총알의 파괴력은 속도에서 나옵니다’”라고 썼다. (이 글은 2019년 2월에 쓰였고, 현재 영리 유전자 연구검사는 확대 승인된 상태다.)

반대로 아예 전류가 흐르지 않는 분야도 있다. 지은이는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라는 용어를 소개하며 “시행되지 않는 연구의 윤리” 문제를 짚는다. 거대 권력과 자본을 대변하는 연구 경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정작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중요 연구들이 아예 시행조차 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연구의 단지 10%만이 전 지구적 건강 문제의 90%에 해당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고, 이 같은 연구의 빈약함 탓에 ‘퓨즈’를 위한 정책 시행이 막히고 있다고 본다.

지은이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더 많은 퓨즈가 과전류에 타버리기 전에 정부가 이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 우리 모두는 취약성과 불완전성을 본질로 하는 존재이기에 취약성은 결함이 아니라 공동체의 근본 토대라는 것. 15년을 점프해도 여전히 현재적인 답이 많은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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