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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n번방을 부순 ‘추적’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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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단 불꽃’의 ‘엔(n)번방 추적기’ 생생하게 담아낸 기록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기획 보도 오연서 기자 서평


한겨레

‘추적단 불꽃’(불꽃)의 ‘불’과 ‘단’이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 옥상정원에서 이야기하며 걷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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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추적단 불꽃’ 지음/이봄·1만7000원

“엔(n)번방은 이미 7월에 정점을 찍고 지나갔어요. 언론은 왜 관심이 없는 걸까요?”

지난해 11월13일 밤,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추적단 불꽃’(불꽃)이 인터뷰를 위해 처음 만난 기자에게 한 말이었다. ‘불꽃’이 텔레그램 성착취 세계를 경찰에 신고한 지 4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언론에서는 기사 한줄 나가지 않았고, 세상은 조용했다. ‘불꽃’은 “언론이 이 문제에 왜 관심을 갖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의문으로 덮어두지 않았다. 의문을 깨부수고 직접 이 세계를 세상에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책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는 ‘불꽃’이 그해 7월부터 ‘엔(n)번방’을 추적하고 이 문제를 수사기관과 사회에 알린 뒤 피해자와 연대하는 1년의 과정을 담았다.

한겨레

기자지망생이었던 ‘불’과 ‘단’은 지난해 7월 뉴스통신진흥회의 ‘탐사 심층 르포 취재물’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처음 텔레그램 성착취 세계에 발을 디뎠다.(‘불꽃’ 두 사람은 신상을 드러내지 않고 각각 ‘불’과 ‘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20대 여성으로서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생활 속에서 몸소 느껴온 이들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고, 수차례 공론화가 된 문제였지만 디지털 성범죄의 세계는 은밀한 구석을 찾아 계속해서 몸집을 키워왔다. ‘불꽃’은 심층취재로 이 세계를 낱낱이 고발해 끝장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 한달 동안 텔레그램 내 수많은 성착취방을 추적했다. 그 방에는 여성들을 협박해 뜯어낸 성착취물과 이들의 신상정보가 함께 올라왔다. 수만명의 가해자들은 더 수위 높은 자료를 요구하며 범죄를 이어갔다. 이들 ‘가해자 연대’의 규모가 커질수록 무력감이 ‘불꽃’을 짓눌렀다. 그럴수록 ‘불꽃’은 더 치밀하게 기사를 써내려갔다.

무력감은 텔레그램 세계 밖으로 나와서도 마주했다. ‘불꽃’이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신고하기 위해 가장 먼저 만난 경찰관으로부터 들은 첫 마디는 “피해자 ‘본인’이냐”는 질문이었다. 경찰은 “피해자 본인이 아니면 신고가 힘들다”는 말도 했다. 기사를 쓰는 것을 끝으로 추적을 멈춰야 하는지도 고민했지만, 이미 ‘불꽃’의 손에는 이 세계가 얼마나 잔혹하고 참담한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얼굴과 신상정보가 모두 노출된 피해자들도 수십명이었다. ‘불꽃’은 강원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수사 의뢰를 했고, 수사 협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추적 기간이 길어질수록 ‘불꽃’에게 추적과 일상의 경계는 흐릿해졌다. 취업 준비와 병행하며 새벽 3∼4시까지 추적을 하다 보면 텔레그램방에서 본 모습들이 꿈에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불꽃’은 학교 후배가 지인능욕(일반인의 얼굴과 나체사진 등을 합성한 성착취 범죄) 범죄의 피해자가 돼 텔레그램방에 사진이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불꽃’은 가해자를 특정하기 너무 어려운 상황에서 후배에게 피해사실만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충격만 주는 것은 아닐까 고민이 돼 끝내 후배에게 이 얘기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런 죄책감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싹튼 것은 ‘불신’이라는 감정이었다. ‘불꽃’이 추적 중이던 텔레그램 성착취방에는 이들과 알고 지내던 한 남성도 들어와 있었다. 불법촬영물과 음담패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방이었다. ‘불꽃’은 책에서 “내 주변에도 가해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날 이후, 두려움과 공포가 피부로 느껴졌다. 내 주변에도 가해자가 있는데, 내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도 어디에서 찍히지 않을까? 아니, 이미 찍히지 않았을까? 공포는 날이 가면 갈수록 커져갔지만, 끝까지 취재해야겠다는 결심 또한 이상하리만큼 커져 갔다”고 썼다.

<한겨레>의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기획 보도 뒤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뒤, ‘불꽃’은 ‘엔번방 사건’을 공론화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젊은 여성들의 연대로 ‘엔번방 사건’이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되면서 국민청원, 국회 입법청원까지 성공했지만, 실질적 변화는 더디기만 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엔번방 방지법’을 논의하는 국회의원들은 성착취물에 대해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처벌할 것이냐?”며 2차가해 발언을 쏟아냈다. 이런 광경을 보며 ‘불꽃’은 “그들은 디지털 성범죄의 개념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국회의원들의 처참한 인지 수준이 드러나는 현장이었다”고 회상했다.

지난 3월 ‘박사’ 조주빈(24)씨가 경찰에 검거됐다. 이후 엔번방을 만든 ‘갓갓’ 문형욱(25)씨도 잡혔다. 현재는 이들과 주요 공범들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제 ‘불꽃’의 시선은 피해자들 쪽에 더 무게 중심을 뒀다. 2차가해와 맞서 싸우고, 피해자들에게 일상을 되찾아주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지난 4월에는 정부 서울청사 국무조정실 회의에 참석해 피해자 지원을 전담하는 상설부서 설치의 필요성에 대해서 정부 관계자들에게 설명했다. ‘불꽃’은 바로 이날이 그동안의 ‘추적’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상받은 날인 것 같다고 말하며 이렇게 썼다. “지난해 여름, 우리가 가진 문제의식이 마침내 여기 정부 청사 국무조정실까지 도착했다. 우리가 느낀 환멸과 좌절이 보상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가 생겼다.”

‘불꽃’의 오랜 추적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과제를 남겼다. 우리는 이제 디지털 성범죄를 소수의 ‘몹쓸자’들이 저지르는 범죄라거나 소리 내지 못하는 ‘이름 모를’ 피해자들이 당하는 범죄라고 얘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고,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다. 그러니 “한쪽으로 치워놓지 말자”고, “같이 연대하자”고 ‘불꽃’은 지난 1년여간 힘주어 말했다. 그게, 불꽃이 이 책의 제목을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라고 지은 이유 아닐까.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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