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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실크로드는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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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교류학·실크로드학 세계적 권위자 정수일 소장의 새 연구서

실크로드 종착지 한반도 연장 입증…‘환지구 해상실크로드’ 제창


한겨레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로만 글라스’. 신라와 고대 로마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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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실크로드

정수일 지음/창비·3만원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은 실크로드학·문명교류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1992년 <신라 서역 교류사>를 출간한 이래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실크로드 사전> <해양실크로드 사전>을 포함한 20여 종의 연구서를 펴냈다. 특히 2013년에 펴낸 <실크로드 사전>은 영어로 번역돼 영어권 최초의 실크로드 사전으로 등록됐다. <우리 안의 실크로드>는 이런 저술 작업을 하는 중에 지난 10여 년 동안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실크로드학·문명교류학 관련 논문을 한데 모은 것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실크로드의 개념을 재정립해 4단계 진화론으로 제시하고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점을 한반도로 확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 책은 먼저 ‘실크로드’라는 말을 ‘인류 문명의 교류 통로에 대한 범칭’이라고 규정하고 시작한다. 실크로드는 한나라 때 비단을 수출하던 길을 가리키는 데서 출발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 의미가 확대돼 문명교류의 통로를 지칭하는 일반 용어로 정착했다. 지은이의 설명을 따르면, 실크로드의 개념은 네 단계를 거쳐 진화했다. 실크로드가 처음 등장한 것은 지금부터 140여 년 전이다. 1877년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중국>이라는 책에서 이 말을 최초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때의 실크로드는 고대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북 인도로 물산이 수출되던 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리히트호펜은 중국의 주요 수출품이 비단이었다는 데 착안해 그 길을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세(Seidenstrasse), 곧 실크로드라고 불렀다. 이것이 제1단계 실크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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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들어와 중앙아시아를 넘어 지중해에 인접한 시리아의 팔미라에서까지 한나라 비단 유물이 발견됐다. 독일의 동양학자 알베르트 헤르만은 1910년 비단 교역의 길을 시리아까지 연장했다. 그리하여 제2단계 실크로드 개념이 탄생했다. 이 비단 유물은 북위 40도 내외의 사막을 따라 점점이 솟은 오아시스에서만 발견됐기 때문에 이 길을 오아시스로라고도 한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오아시스로가 로마로까지 연장됐다. 더 나아가 유라시아대륙 북방 초원지대를 관통하는 북위 50도 초원길과 지중해에서부터 중국 동남해안에 이르는 바닷길이 실크로드에 포함돼 이른바 ‘3대 간선’으로 그 개념이 넓어졌다. 여기에 이 3대 간선을 위아래로 종단하는 5대 지선까지 더해져 실크로드 개념은 제3단계에 이르러 한층 더 풍부해졌다.

지은이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마지막 넷째 단계를 거론한다. 15세기 대항해시대 개막 뒤 1522년 포르투갈 사람 마젤란이 이끄는 선단이 대서양-태평양-인도양을 거쳐 지구를 일주하는 해로를 뚫으면서 완성된 ‘환지구로’ 단계다. 이 길이 열림으로써 감자·고구마·옥수수·고추·토마토·담배 같은 아메리카의 작물이 세계인의 것이 됐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뚫린 태평양 해로를 따라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가 라틴아메리카로 수출되고 라틴아메리카 은광에서 나온 백은이 중국으로 유입됐다는 사실이다. 15~16세기경 라틴아메리카의 백은 생산량은 전 세계 백은 생산량의 60%에 이르렀는데, 이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중국으로 들어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생활상을 변화시켰다. 과거의 오아시스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변화를 안긴 해상 실크로드인 셈이다.

실크로드의 4단계 진화와 함께 지은이는 이 책의 또 다른 목표인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을 입증하는 데 공력을 들인다. 그동안 학자들은 통념에 사로잡혀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중국으로 보았다. 하지만 한반도는 선사시대 이래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문명의 혈관으로 삼아 문화를 살찌웠다. 북방 초원길은 인류 문명의 초기 이동로이기도 한데, 이 길을 따라 한반도에 빗살무늬토기가 전파됐고, 중앙아시아 황금문화대에서 발견되는 금관과 같은 종의 금관이 신라에서 출토됐다. 해상 실크로드도 다르지 않아서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된 거석문화가 인도양과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에 상륙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 유적을 남겼다. 로마에서 장안으로 뻗은 오아시스로도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이어졌다.

여기서 지은이는 신라와 서역의 긴밀했던 관계를 유물과 기록을 들어 설명한다.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 때 제작된 경주 성덕왕릉의 ‘무인상’은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이다. 또 경주 황성동 돌방무덤에서 나온 토용 중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홀을 든 서역인의 상이 있다. 이 두 유물은 서역인들이 신라에 들어와 무관이나 문관으로 기용됐음을 알려준다. 또 불국사 경내에서 출토된 돌십자가와 성모 마리아 소상은 이미 7~8세기에 기독교 종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당나라를 거쳐 신라에까지 전해졌음을 알게 해준다. 한반도와 기독교가 신라에서 이미 조우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리스·로마의 물품들이 다수 경주 유적에서 발굴됐다는 사실이다. 4~6세기 신라 고분에서는 ‘후기 로만 글라스’가 다수 출토됐고, 와인잔 풍의 토기가 발굴됐으며, 말머리로 장식한 뿔잔도 나왔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뿔잔은 풍요를 상징했는데, 신라는 그 뿔잔을 받아들여 다양한 형태와 용도로 변형했다.

신라와 서역의 교역은 이슬람 문헌에도 나타난다.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820~912)는 신라를 “중국 동해에 있는 나라”라고 부르며 이 나라로부터 비단·검·말안장·도기를 비롯한 11가지 품목을 수입한다고 썼다. 또 일본 나라의 쇼쇼인(정창원)에 소장된 ‘매신라물해’(신라 물품 매입 명세서)를 보면 경덕왕 11년(752년)에 42종의 물품을 신라에서 수입했는데, 이 중 7종이 서역이나 동남아의 물산이었다. 신라가 아랍·이슬람 지역과 교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개무역까지 했음을 알려주는 자료다. 동서교류는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아랍 상인들이 한 번에 100여 명씩 배를 타고 개경까지 왔다고 <고려사>는 기록했다. 지은이는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전거로 삼아 실크로드야말로 한반도 문명을 키운 젖줄이었음을 논증한다. 문명은 길을 따라 전파되고 섞임과 혼효 속에서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실크로드의 역사는 생생히 보여준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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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3대 간선과 5대 지선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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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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