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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투키디데스 함정’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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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전에 맞서며: 전통, 모험, 혁신의 그리스 로마 고전 읽기

메리 비어드 지음, 강혜정 옮김/글항아리·2만9000원

영국의 여성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는 그리스·로마 고전 연구의 권위자다. <고전에 맞서며>는 비어드가 <런던 리뷰 오브 북스>를 비롯한 서평 전문지에 20년 동안 쓴 고전학 관련서들에 대한 비평 31편을 묶은 책이다. 책에 대한 책이라고는 해도 소개되는 책의 내용을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고전학 전문 지식에 입각해 해당 주제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관점을 앞세워 비판적으로 논평하고 있기 때문에 글마다 상당한 깊이를 보여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얼마나 위대한가?’, ‘그리스인은 어떤 때에 웃었을까?’ 같은 흥미로운 주제가 펼쳐진다.

특히 ‘어느 투키디데스를 믿을 것인가?’ 편을 보면 비어드의 실력과 안목이 여실히 드러난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30년 전쟁을 다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지은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포함해 과거의 역사 기록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분석적인 서술로 역사 서술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래서 그리스 최고의 역사가로 꼽힌다. 더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두 세력의 전쟁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오늘날에도 국제정치학에서 자주 원용되고 있다.

하지만 투키디데스는 ‘거의 해석이 불가능하다 싶을 만큼 난해한 그리스어’로 이 저작을 기술했다. 온갖 신조어, 어색한 추상관념, 각종 희한한 표현이 버무려져 당대 독자들마저 격분시켰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 전쟁사 책의 ‘훌륭한’ 번역, 다시 말해 유창하고 잘 읽히는 번역은 원본의 특성을 살리지 않은 것이어서 독자에게 실상을 오해하게 할 여지가 크다. 실제로 투키디데스의 말로 알려진 유명한 문장들은 원문과는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 지은이는 대표적인 경우로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만, 약자는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느라 고달프다”라는 문장을 꼽는다. 아테네 대표들이 자기편에 서지 않는 소국 밀로스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이 문장은 국제관계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경구이지만, 원본을 보면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고, 약자는 따른다’는 다소 밋밋한 문장이다. 그런데도 원문을 왜곡한 문장이 투키디데스의 주장으로 알려진 데는 19세기 고전학자 리처드 크롤리의 책임이 크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크롤리가 원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대중의 입맛에 맞춘 덕에 이 번역본이 정본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투키디데스의 경구들은 오늘날 신보수주의·현실주의 정치학에 그대로 인용되고, 때로는 좌익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는 슬로건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 사례의 하나로 비어드는 미국의 보수주의자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연구를 거론한다. 케이건의 요지는 민주주의 국가 아테네가 권위주의 국가 스파르타를 사전에 제압하지 않은 것이 결국 패배를 불렀다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들과는 다른 주장이다. 나중에 케이건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쓴 <미국이 잠자는 동안>이라는 책에서 군비 증강을 요구하는 호전적인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미국을 아테네에 비유하면서 다른 스파르타형 국가를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와중에 자주 거론되는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것도 투키디데스 저작에 대한 오독이나 곡해의 결과는 아닐지 의심을 품어봄 직하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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