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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키스 해링 | 맨해튼을 캔버스로 삼은 천재 낙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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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끔찍한 몸살을 앓고 있다. 사실 전염병이나 감염병 자체는 인류와 역사를 함께 해왔으니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몸소 증명하듯 새로운 바이러스 출현이나 대유행의 경우에는 마땅한 대응책도 없이 지독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하물며 그런 질병이 동성애라는 사회적 편견과 연관된다면 어떨까. 1981년 최초로 세상에 알려진 이래, 1980년대 뉴욕 미술계를 강타했던 에이즈(AIDS)처럼. 주로 동성애자 간에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들은 질병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도 싸워야만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길거리 낙서화를 통해 동성애자의 인권 옹호와 에이즈 위험성 전파를 위해 열정을 바친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년)이다.

아마추어 만화가로 활동한 아버지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 예술 전반에 관심이 많았고,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는 아이였다. 상업미술 등 여러 일을 전전하다 예술가의 꿈을 안고 스물이 되던 1978년, 고향 펜실베니아를 떠나 미대 진학을 위해 뉴욕으로 이주한다. 이때부터 그는 지하철역을 자신의 가장 완벽한 작업실로 삼았다. 비어 있는 광고용 검정 벽면이나 바닥 등 공간만 있으면 하얀 분필로 낙서화를 그렸는데, 어찌나 독특한지 금세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손을 떼지 않고 쓱쓱 즉흥적으로 그린 듯 한데도 구성이 완벽하고 이미지가 흥미로워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스타일의 낙서화였다.

인기를 얻은 해링은 이내 맨해튼 전역을 자신의 캔버스로 삼았다. 재료도 분필만이 아니라 그릴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구애받지 않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절친 바스키아와 더불어 1980년대 뉴욕 길거리 문화와 낙서화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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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침묵=죽음(Silence=Death, 1988년)’. 그의 전작 중 두 개밖에 없는 삼각형 형태의 캔버스 작품 가운데 한 점이다. 2019년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560만달러(약 66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오른쪽) ‘무제(Untitled, 1984년)’. 3m가 넘는 대형화로, 2018년 10월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약 400만파운드(약 60억원)에 낙찰된 바 있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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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바스키아는 비슷한 점이 꽤 많다. 첫째, 길거리 낙서화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단시간에 뉴욕 주류 미술계의 스타가 됐다. 둘째, 앤디 워홀과 친하게 교류하면서 공동 작업을 하는 등 팝아트적 요소를 두루 흡수했다. 셋째,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똑 닮았다. 바스키아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28세에, 해링은 에이즈로 인해 31세에 사망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점이 있다. 낙서화 스타일이다.

거친 붓질로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바스키아에 비해 해링의 작품은 어떠한가.

예를 들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침묵=죽음(Silence=Death)’이라는 제목의 1988년작을 보라. 뒤집어진 삼각형 모양의 캔버스에 분홍색 바탕이 우선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위에 대담한 은색 테두리선만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은 각각 눈, 귀, 입을 틀어막은 형상이다. 이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분명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도, 내가 아닌 동성애자들만의 문제라며 에이즈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회 전반을 빗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링의 작품은 단순한 드로잉이 아니라 기호로 읽힐 수 있다. 경쾌하고 밝은 시각적 매력으로 관객들의 주목을 끈 후, 이를 통해 심각한 사회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의 전작 중 두 개밖에 없는 삼각형 형태의 캔버스 작품이다. 2019년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560만달러(약 66억원)에 낙찰돼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다른 한 점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은 바스키아를 기리기 위해서 그린 작품이다. 결국 두 점은 각각 당대 뉴욕 미술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 약물과 에이즈의 폐해에 대한 경각심을 위해 제작됐던 셈. 평소 자신이 동성애자인 것을 감추지 않았던 그는 1987년,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내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것이 나의 활동과 프로젝트들이 지금 너무도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고, 이 작품을 그린 이듬해 결국 에이즈 진단을 받았다.

해링의 주제가 에이즈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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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Self-Portrait, 1989년)’. 4m에 달하는 대형 조각으로, 2014년 11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80만달러(약 9억50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2020 Christie's Images Limited.


1984년의 대표작은 인간, 자연, 기술 사이 마지막 결전 장면 같은 흥미로운 그림이다. 거대한 피라미드 위에 놓여진 컴퓨터는 마치 제단 위에 모셔진 신처럼 묘사돼 있다. 그 옆에는 우주선과 인간의 뇌가 천칭에 각기 놓여 있다. 인간과 외계의 능력을 견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숭배하며 절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들은 로봇과 괴수에 붙들려 있다.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를 연상시키는 머리가 여럿 달린 뱀은 컴퓨터 오른쪽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이처럼 고대 문명과 미래 판타지가 혼재하는 이 작품은 가정용 컴퓨터의 보급(1981년), 영화 ET(1982년)의 메가 히트 등 당대 문화 전반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으로 화폭에 옮겨내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전체 구도는 서양미술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옥화를 연상시키지만, 그 안에는 1980년대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마치 재즈의 즉흥 연주처럼 밑그림도 없이 굵은 테두리 선으로 대담하게, 복잡한 구성을 완벽하게 살린 이 작품은 다가오는 새로운 기술 시대에 대한 초상화다. 당대 사람들의 기대와 불안 같은 복잡한 심정이 잘 담겨 있다. 낙서화의 시각적 요소들, 만화, 문학 등 여러 요소가 혼합된 이 그림은 네 개의 캔버스가 합쳐진, 3m가 넘는 대형화다. 2018년 10월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약 400만파운드(약 60억원)에 낙찰됐다.

헤링은 공공미술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조각도 다수 제작했다. ‘자화상(Self-Portrait, 1989년)’은 그의 조각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4m에 육박하는 대형 조각으로 철판을 아주 얇게 사용해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을 경쾌하게 연출했다. 그의 주된 작품 주제는 사회 정치적 코멘트지만, 춤 역시 늘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생기와 움직임이 부여돼 생명력이 넘치는 이 작품은 에이즈 진단을 받은 후 제작했다. 자신의 죽음을 탄식하기보다 자신의 삶과 열정을 축하하는 모습이어서 뭉클한 감동을 준다.

그가 많은 후세대 예술가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고, 컬렉터에게 높은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진난만하게만 보이는 작품에 담긴 진심 때문 아닐까. 길거리 예술, 낙서화, 팝아트, 고급 미술 간 구분을 무너뜨린 해링의 작품은 어떤 언어를 쓰든, 배경이 무엇이든, 미술이나 미술사에 지식이 있든 없든, 이해 가능하고 따뜻한 공명을 일으킨다. 이것이 아마 서른하나의 짧은 생을 산 그의 예술이 잊히지 않은 이유이리라.

매경이코노미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77호·추석합본호 (2020.09.23~10.0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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