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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시선] 배부르지 않아도 괜찮은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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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모가 보내주신 택배가 도착했다. 너무 죄송하지만 커다란 아이스박스 한가득 담긴 생선을 보면 솔직히 이걸 다 어떻게 정리해서 넣어야 할지 막막함부터 앞선다. 크기라도 작으면 좀 좋겠다만, 고모가 보낸 생선은 크기부터 어마어마하다. 봉투를 양쪽으로 씌우고 냉동실 한 칸을 다 비운 뒤 억지로 대각선으로 쑤셔 넣어야 간신히 갈무리된다. 우리집 냉동실 사정을 고모가 알 턱이 있나. 그래도 고모에게 택배를 그만 보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게 고모의 사랑인 걸, 마흔이 넘은 조카도 고모에게는 늘 사랑하는 강아지인데, 그 사랑 이제 넣어두시라고 나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 이렇게 늘 툴툴대면서도 고모의 사랑 덕에 나는 종종 “고흥에서 요만한 녀석은 삼치로 쳐주지도 않는다”며 남들에게 생선부심을 부리곤 한다.

경향신문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고모뿐이 아니다. 내 주변 많은 여성이 사랑을 음식으로 표현한다. 엄마가 쓰러지고 참 힘들던 그 겨울, 언니들은 그렇게 내 냉장고를 채워줬다. 말린 나물이며 우거지, 장아찌부터 김치에 밑반찬까지 그 어느 때보다 밥상이 풍요로웠다. 반찬통엔 응원, 격려, 애정이 담겨 있다. 시어머니만 해도 설이건 추석이건 맞은편 1인 가구 세 집에 전이며 떡을 돌리고 나야 진짜 명절이다. 보고 배운 걸까. 나도 유난히 먹을 것 앞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요리가 맛있게 됐다 싶은 날이면 한 그릇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줄줄이 사탕이다. 함께 모여 즐거운 식사를 나누는 일은 늘 행복하다. 그러니 명절문화가 담고 있는 가부장제 질서에 숨이 막히면서도 이번 명절엔 누구를 만나고 뭘 먹게 될지, 헤어질 때 뭘 나눠주고 받아올지 설렌다. 많이 모여서 많이 먹고 많이 싸와야 명절을 잘 보냈다는 생각을 하는 나는 옛날 사람이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이제 바뀔 시간이 왔다는 걸 몸으로 느낀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올해는 적게 모이고, 혹 모인다 해도 왁자지껄 무언가를 나눠 먹는 일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있다. 꼭 코로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배부른 명절문화 때문에 사람들은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양의 장을 보고, 필요량을 훌쩍 넘겨 음식을 만들고, 이를 보관하느라 냉장고는 에너지를 더 많이 쓰며, 종내는 음식물쓰레기 처리 비용을 지불한다. 푸근한 명절의 뒤끝에는 내 지갑만 팍팍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도 몸살을 앓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다.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에코리더는 못 되더라도 필(必)환경시대 꽁무니라도 따라가려면 다른 명절을 상상해내야 한다.

상에 올릴 음식의 가짓수를 좀 줄이고, ‘냉동실에 넣어뒀다 비상용 반찬으로 써야지’ 하지 말고 처음부터 먹을 만큼만 만들고, 무엇보다 고기를 좀 줄이면 지갑도 지구도 덜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음식이 부족하다고 덜 반갑거나, 고기반찬이 줄었다고 만남의 이유도 같이 줄어든다면 그 관계의 문제이지 상차림이 원인이겠나. 헤어질 땐 동그랑땡 한 봉지라도 들려보내야 할 것 같은 마음을, 맛있는 것 좀 싸주시려나 하는 기대를, 이제 내려놓으려 한다. 불 앞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인 만큼 눈맞춤하는 시간을 늘리고 튀김젓가락 대신 손을 잡기로, 올해부터는 반가운 마음을 그렇게 전달하려 한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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