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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나발니 깨어나자…‘푸틴의 셰프’가 칼을 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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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발니 공격 나선 ‘푸틴의 해결사’

옛 소련이 개발한 독극물 노비촉에 중독돼 독일에서 치료받고 있는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친위 세력이 혹독하게 압박하고 있다. 나발니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그의 러시아 내 재산이 압류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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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한 나발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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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현지 시각) 나발니의 대변인을 맡고 있는 키라 야르미슈는 모스크바 남동쪽 외곽에 있는 나발니의 아파트가 법원에 의해 압류됐다고 밝혔다. 그의 은행 계좌도 동결됐다. 법원 결정은 나발니가 노비촉에 중독된 지 일주일이 지나 생사의 고비에 있을 시점인 지난달 27일 내려졌으며, 나발니 측은 뒤늦게 알게 됐다. 러시아에서는 법원 역시 푸틴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는 게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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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미디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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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발니 공격의 총대는 ‘푸틴의 셰프’로 불리는 최측근 사업가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맸다. 나발니는 2018년 모스크바 일대의 유치원·학교에서 대규모 식중독 사태를 일으킨 프리고진 소유의 급식 업체가 불결한 음식을 학생들에게 먹인 실태를 유튜브 영상을 통해 고발했다. 프리고진은 명예가 훼손됐다며 나발니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작년 10월 모스크바법원은 나발니에게 8800만루블(약 13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법원은 10개월이 지나 나발니가 노비촉 공격을 받고 중태에 빠진 순간 느닷없이 재산 압류 명령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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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셰프'로 불리는 에브게니 프리고진이 2011년 푸틴의 식사 자리에서 서빙을 하는 모습./A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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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고진은 푸틴이 해외 유명 인사와 식사할 때 직접 서빙을 하면서 ‘푸틴의 셰프’란 별명을 얻었다. 20대에 길거리 핫도그 장사로 시작해 요식 사업으로 성공한 프리고진은 푸틴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학교 급식 사업을 석권했다. 크렘린궁에 파티가 열리면 그의 회사가 음식을 독점 공급한다.

셰프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근년에 사설 군인을 돈을 받고 빌려주는 ‘바이네르’라는 용병 기업을 설립한 뒤 중동과 아프리카 각 지역의 분쟁에 개입해 왔다. 드러내놓고 러시아군이 투입되면 서방의 눈에 쉽게 포착되기 때문에 프리고진 휘하의 사설 용병을 중동·아프리카의 분쟁 해결에 투입해 러시아의 영향력을 키웠다는 얘기다. 서방의 정보 전문가들은 프리고진이 벌이는 음식과 용병 사업의 이면을 파고 들어가면 푸틴의 치부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해왔다. 프리고진은 각국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막대한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의혹도 받고 있다. 자가용 제트 비행기와 최고급 요트를 굴리는 호화 생활을 하고 있어 나발니의 추적을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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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게니 프리고진/모스크바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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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발니에 대한 테러 시도와 재산 압류 등 일련의 흐름을 보면 푸틴 측이 갈수록 나발니를 의식하고 버거워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나발니의 유튜브는 구독자가 411만명이며, 푸틴을 겨냥하는 그의 동영상들의 조회수 합계는 8억회에 달한다. 변호사 출신답게 달변인 데다, 갖가지 실체적 증거를 들이대며 푸틴 측의 부패나 정치 공작을 까발려 인기를 모은다. 푸틴의 측근이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총리가 12억달러(약 1조4000억원) 규모의 부정 축재를 한 근거를 폭로한 영상은 조회수가 3700만회에 달한다.

나발니는 독극물 테러에서 기사회생하는 드라마를 연출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지난 23일 베를린의 샤리테병원에서 퇴원한 나발니는 통원 치료 후 몸이 회복되면 러시아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미국에 망명한 러시아 출신 대학 교수들은 최근 나발니를 올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이 때문에 나발니에 대한 프리고진의 손해배상 소송, 법원의 나발니 재산 압류 결정 등이 프리고진과 푸틴의 교감하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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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왼쪽)가 25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오른쪽은 그의 아내 율리아. /나발니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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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주요 언론들은 푸틴이 올해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는 보도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7월 사실상 종신 집권이 가능하도록 개헌하면서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이 커지고 있다. 푸틴의 여론 지지율은 최근 60% 안팎에 그쳐, 80%대를 꾸준히 유지하던 2014~2018년에 비해 눈에 띄게 낮아졌다. 지난달 동부 하바롭스크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달 초 치른 지방선거에서는 나발니와 가까운 인사들이 시베리아에서 다수 당선됐다. 러시아 정치평론가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는 외신 인터뷰에서 “정권이 나발니를 제거하면 푸틴에 대한 민심 이반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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