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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아무튼, 주말] 바퀴벌레 잡기·줄 서기···뭐든지 대신해드려요, 우리는 ‘대신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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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 대행 알바 체험

대한민국은 ‘뭐든지 대신해주는’ 사회가 됐다. 음식 배달에서 출발한 각종 대행 서비스는 이미 생활의 모든 영역에 침투했다. 빨래(런드리고, 세탁특공대)나 청소(청소연구소, 미소)같은 집안일 대행 서비스는 물론, 편의점 음식을 집까지 가져다주고(편돌이) 심지어 회사 경리 업무(경리박사)나 채용(인크루트)까지 대신해주기도 한다. 대행 업무 영역에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고 수요자와 공급자를 연결해주는 플랫폼도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다.

‘대신맨’을 찾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건, 이들의 일을 해줄 ‘대신맨’도 늘어난다는 것. 한국노동연구원의 작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 특수고용직 규모는 221만명에 달한다. 2011년 130만명에 비해 90만명 이상 늘어난 것인데, 이중 55만명은 플랫폼 노동자 같은 이른바 ‘신(新)특고’ 노동자다. 누군가의 일을 대신한다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 됐다. 그래서 ‘아무튼, 주말’도 도전했다. 심부름 대신맨의 일상.

◇'적자 대행' 끝에 커피를 받았다

조선일보

기자는 지난 21일부터 23일까지 심부름 대행 플랫폼 '애니맨'에서 대신맨의 일과를 체험했다. 사진은 22일 잡은 김밥 배달 미션. 명동에서 성북구 모텔까지 배달하는 조건으로 8000원을 받기로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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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심부름 대행 플랫폼 ‘애니맨’을 이용했다. 애니맨은 의뢰인이 필요한 업무를 적어 올리면 앱에 등록된 심부름꾼, 일명 ‘헬퍼’들이 희망 가격을 적어 입찰하는 방식의 중개 플랫폼이다. 의뢰 종류는 다양하다. 집 청소나 설거지 같은 간단한 일부터 이사, 가구 조립, 인테리어 같은 고난도 일도 의뢰 가능하다.

‘헬퍼’로 등록하는 과정은 간단했다. 본인 인증을 마치고 신분증 사진을 찍어 올리면 범죄 이력 조회 등을 거쳐 2영업일 후 승인이 완료된다. 문제는 자기소개였다. 경력과 자격증, 보유 장비 등을 기입해야 하는데 막상 쓸만한 이력이 떠오르지 않았다. 심부름하는 데 토익 점수를 적을 수는 없었다. 기자는 대학생 시절 술집, 음식점 등에서 서빙 알바를 했지만 이 또한 심부름에 어울리는 경력은 아니었다. ‘인테리어 공사 10년 차’ ‘이삿짐 센터 15년 차’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헬퍼에 비하면 기자의 경력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어쩔 수 없다, 나이로 어필하는 수밖에. “수많은 알바로 단련된 20대 젊은 헬퍼입니다.” 고심 끝에 자기소개란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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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찰 시작 반나절이 넘도록 일감을 따지 못했다. 수십 번 입찰했지만 일은 모두 다른 헬퍼에게 돌아갔다. 비루한 자기소개가 문제인가, 아니면 심부름에도 스펙이 필요한가. ‘고객 모드’로 앱에 들어가 본 다음에야 이유를 알았다. 헬퍼가 입찰하면, 고객은 해당 헬퍼가 과거 수행한 임무 건수와 별점을 볼 수 있었다. 기자의 과거 수행 미션 건수는 0번, 별점도 당연히 없었다. 무경력자의 설움이 복받쳤다. 결국 가격 후려치기 전략을 택했다. 고객이 제시한 희망 가격에서 10%, 20%··· 점점 할인율을 높였다.

‘띵동’. 2일 차 오후, 드디어 첫 일감이 떨어졌다. 의뢰자가 2만원에 올린 미션을 반값에 따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두 시간 안에 대치동 초등 수학 학원에서 아이 교재를 받아 서초구 자택으로 갖다 주기. 당장 버스를 타고 대치동으로 향했다.

교재 받는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문제는 학원 문을 나서면서 시작됐다. 시간은 이미 저녁 여섯 시. 퇴근 시간 강남 8차선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미션 시각까지 남은 시간은 20분인데, 지도 앱으로 확인한 예상 도착 시각은 40분이 훌쩍 넘었다. ‘첫 의뢰부터 지각할 순 없다!’ 결국 택시를 잡았다.

1만800원. 장소에 도착해 미터기에 찍힌 금액이었다. 택시비만 이미 미션 금액을 넘어서 있었다. 왕복 이동 시간 포함 세 시간을 날리고, 적자까지 본 셈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우울해진 마음으로 의뢰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애니맨입니다.” 평상복 차림의 30대 주부 의뢰인이 문을 열었다. 손에는 생수와 캔커피가 들려 있었다. “죄송해요, 너무 낮은 가격에 일을 시켜서···. 안전히 갖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인간은 이토록 간사한가. 아쉬웠던 마음은 금세 사라졌다.

◇필라테스 수업 받고, 직구 방법 알려주고

의뢰가 언제 올라올까 오매불망 새로 고침만 반복하던 밤 11시, 특이한 의뢰가 눈에 띄었다. “강남 필라테스 학원 강사입니다. 시범 수업 수강생을 구합니다.” 별도 보수가 없는 대신, 회당 6만~8만원인 고급 기구 필라테스를 무료로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이건 신종 사기인가, 아니면 인신매매 수법인가. 그러나 두려움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뭔가에 홀린 듯 입찰 버튼을 눌렀다. 의뢰인은 “다음 날 오후 3시까지 강남역 앞 빌딩으로 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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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에서 김밥을 포장한 뒤 미션창을 보며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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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과는 달리 의뢰 내용은 진짜였다. 글을 올린 이는 강남의 한 필라테스 학원 강사인 20대 강수연(가명)씨. 학원 관계자는 “강씨가 아직 자격증을 획득한 지 얼마 안 돼 무료 강습을 하면서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 강씨는 “예비 강습을 받을 지인을 구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얼마 전부터 심부름 대행 서비스로 수강생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일종의 ‘지인 대행’이었다. 정식 등록을 위한 미끼 상품 아니냐는 질문에는 “아직 정식 등록을 제안한 적도, 받아본 적도 없다”고 했다. 정말로 등록 제안은 없었다. 필라테스를 처음 해보는 기자는 이날 한 시간 동안 “아악, 선생님 너무 아파요!”만 반복하다 땀 범벅이 돼 학원 문을 나섰다.

이틀간 두 번 더 미션을 수행했다. 배달을 하지 않는 명동의 유명 충무김밥집에서 성북구 한 모텔까지 김밥을 배달하는 미션은 8000원을 받았다. 해외 직구가 처음인 한 직장인에게 중국 쇼핑몰에서 물건 구매 방법을 알려주고는 7000원을 받았다. 이렇게 네 번 미션을 수행하고 받은 돈은 총 2만5000원. 여기서 플랫폼 수수료 10%를 제하고 나니 기자 손에는 2만2500원이 떨어졌다. 미션에 걸린 시간(이동 시간 포함 8시간, 이동 시간 제외 3시간)에 비하면 적었지만, 거래 건수 ‘0건’인 초보임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부수입이었다. 애니맨에 따르면 인테리어·가구 조립 등 고가의 의뢰를 전문으로 하는 전업 헬퍼들은 하루 최고 30만원까지 벌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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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앱으로 확인하니, 명동에서 도착지까지 대중교통으로 30여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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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불 지핀 ‘대신맨 사회’

국내 대행 시장은 코로나를 거치며 크게 성장했다. 심부름 대행 플랫폼 김집사를 운영하는 달리자에 따르면 올해 6~8월 의뢰 건수가 작년 같은 기간 대비 약 2.5배 늘었다. 달리자 관계자는 “대형 마트에서 마스크를 구매해달라거나, 마트에서 대신 장을 봐달라는 ‘코로나 특화’ 의뢰가 많아졌다”고 했다. 애니맨 운영사 에이에스앤도 코로나 이후인 올해 2분기 의뢰 건수가 작년 동기에 비해 2배가량 늘었다고 밝혔다.

의뢰 종류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애니맨에 자신을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라 소개한 한 의뢰인은 집 앞 병원까지 자신을 안내해줄 헬퍼에게 3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활동 보조인 대행인 셈이다. 다른 의뢰인은 명품 매장에서 한정판 지갑을 당장 구해달라며 2만5000원과 왕복 택시비를 걸었다. ‘줄 서기’ 대행이다. 3년 차 애니맨 헬퍼 김장현(42)씨는 “주로 설비·배관 대행을 하지만 홀로 사는 여성이 바퀴벌레를 잡아달라고 요청하거나, 맞선 자리의 부모님 역할을 부탁하는 의뢰도 있었다”고 했다.

대행 산업의 성장과 이에 맞물린 특수고용직의 증가는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중국에선 각종 대행 서비스를 란런(懒人·게으름뱅이) 경제라 부른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국의 ‘란런 서비스’ 규모는 2015년 594억위안(약 10조1700억원)에서 2018년 5644억위안(약 96조7000억원)으로 3년 만에 9배 넘게 늘었다. 이미 미국 노동자의 36%가 플랫폼 노동을 포함한 긱 이코노미(gig economy·임시직 경제)에 참여하고 있다는 갤럽 통계도 있다. 세계가 ‘대신맨’을 찾는 이들과 ‘대신맨’들로 양분되고 있다.

[유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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