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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혁명 무죄!” 10대 홍위병, 학살의 주체가 되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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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66년 8월 26일, 하얼빈 홍위병 집회에서 헤이롱장성 서기 겸 하얼빈 시위원회 제1서기 런중이(任仲夷)가 비투(批鬪)당하고 있다. 당시 사진기자 리전성(李振盛, 1940-2020)의 작품집에서 발췌. 李振盛, <<紅色新聞兵>> (香港中文大學, 2018), 103>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4회>

나치 정권에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은 1961년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스스로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라 살았다고 진술했다. 그 법정을 참관한 철학자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는 아이히만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악의 상투성(the 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전체주의 정권 하에서 개개인은 정교한 기계 속의 작은 부속이 되어 주어진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 길들여지면 끔찍한 정치범죄도 일상의 업무에 지나지 않는다.

1966년 8-9월 10대의 홍위병들은 분명 바로 그런 “악의 상투성”에 길들여진 상태였다. 그들은 살인이 허용되는 무법 상태에서 혁명의 사명감에 들떠 학살을 감행했다. 그 밑에는 법질서의 해체와 도덕적 아노미(anomie)가 깔려 있었다. 물론 그들은 최고영도자의 암시를 따라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홍위병, 집단 구타로 교사 살해...학교에서 시작된 홍색공포

홍위병 폭력은 교내에서 시작됐다. 1966년 8월 5일, 베이징 사대 부속여중의 교감 볜중옌(당시 50세, 여)이 홍위병의 집단 구타로 사망했다. 홍위병이 살해한 최초의 교사였다. 8월 중순을 지나면서 폭력은 교외로 확산됐다. 홍위병의 테러행위는 민가의 급습 및 약탈, 문화유산의 조직적 파괴, 대량학살의 3단계로 전개되었다.

홍위병들은 반동세력의 재산을 조사하고 몰수한다는 이른바 “초가(抄家)”의 명분으로 민가를 습격했다. 중국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8월 말부터 약 한 달간 베이징에선 3만3695호의 민가가 홍위병의 습격을 받았다. 상하이에선 8월 23일에서 9월 8일까지 “자산계급”의 거주지 8만4222호와 교사 및 지식분자의 거주지 1231호가 파괴됐다.

베이징에서만 10만3000량의(5.7톤) 금, 34만 5200량의 은, 554만원의 현금, 61만3600점의 골동품이 압수됐다. 상하이에서는 금은 등 보석 외에도 미화 334만 달러, 330만 위안화 상당의 외화, 370만 위안의 현금과 채권 등이 압수됐다. 1966년 10월, 공산당의 공식문건엔 전국의 홍위병들이 “착취계급”에게서 65톤의 금을 압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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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을 접견하는 홍위병의 환호/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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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의 반달리즘: 역사유적의 파괴

홍위병들은 또한 문화유산과 공공재산을 파괴했다. 문혁 10년 동안 베이징의 국가지정 유적지 6843 곳 중에서 4922 곳이 훼멸됐는데, 그중 다수가 1966년 홍팔월(紅八月)의 테러로 파괴됐다. 홍위병들은 자금성(紫禁城)을 파괴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군대를 급파해 접근을 막았다.

1966년 11월 베이징의 홍위병 수백 명은 기차를 타고 산둥성 취푸(曲阜)로 내려가 4주간 머물면서 그 지역 홍위병들과 합세해서 공부(孔府, 공자 유적지)의 문화재 6618점을 파괴했다. 공자(孔子)에 대한 적개심은 지식분자에 대한 경멸로 표출됐다. 홍위병들은 역사유물 뿐만 아니라 공공 도서관도 파괴했다. 문혁 기간 전국 1100개의 현(縣) 단위 이상의 도서관 중에서 3분의 1이 폐관되었다. 랴오닝, 지린, 허난, 장시, 꾸이저우 등지에서만 700만권의 서적이 훼멸됐다.

다섯 부류의 검은 집단 색출해 살상

홍위병 집단의 주요 타격대상은 흑오류(黑五類), 곧 ‘다섯 부류의 검은 집단’이었다. “해방” 이후 17년이 지난 후였다. 지주, 부농, 반동분자, 파괴분자(전과자 등), 우파 등의 흑오류는 이미 제거되거나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홍위병들은 법적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정치천민을 색출해 박해했다. 1966년 8월 18일에서 9월 15일까지 베이징 인구의 1.7프로에 달하는 7만 7000여 명이 축출됐다. 전국적으로는 39만 7000명이 도시에서 추방됐다. 보금자리를 잃고 추방된 정치 천민들은 헐벗고 굶주린 채 객사(客死)하거나 유민(流民)으로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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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의 문화유산 파괴/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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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들은 계급의 적인들을 잡아와선 구타하고, 고문하고, 모독하는 광기의 비투(批鬪)를 이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홍위병의 독타(毒打, 표독한 구타)에 맞아죽었다. 모멸감을 못 이긴 사람들은 자살을 택했다. 중국의 관방 통계에 따르면, 1966년 가을 베이징에선 1772명이 살해됐다. 같은 해 9월 상하이에선 704명이 자살하고, 534명이 살해됐다.

홍위병은 왜 폭력화됐나?

홍위병들이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1966년 8월 6일, 칭화대학 부속중등학교(이하 부중), 런민대학 부중, 베이징항공대학 부중의 홍위병 집단은 폭력행위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긴급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인신 난타(亂打), 부랑행위, 국가재산 파괴행위” 등을 일삼는 “가짜 좌파조직을 해체하자”고 선언했다.

1966년 8월 13일 ‘베이징 공인(工人) 체육장’(경기장)엔 7만 명의 홍위병들이 운집했다. 폭력의 근절을 위해 “소유맹(小流氓, 부랑아)” 십여 명을 단상에 올리고 비투(批鬪)하는 집회였다. 본래 취지와는 달리 집회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난폭한 집단구타가 발생하고 말았다. 중앙문혁소조의 부조장 왕런중(王任重, 1917-1992)이 그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들의 폭력행위를 방치했다. 당시 7만의 관중은 어떤 메시지를 받았을까. 현장 참석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바로 그 집회가 홍위병이 폭력화되는 중요한 계기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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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세계를 때려 부수고 새로운 새계를 창립하자!’ 홍위병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호/ 공공부문>


1966년 8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톈안먼 광장에서 모두 10차례나 큰 집회가 열렸다. 마오쩌둥은 군중과의 직접 대면을 원했고, 중공중앙은 무료로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면서 전국의 홍위병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덕분에 도합 1200만 명의 군중이 톈안먼 관장에 모여 마오쩌둥을 “알현(謁見)”하는 영광을 누렸다.

1966년 8월 18일이 그 첫 집회였다. 새벽 한 시부터 몰려온 백만의 홍위병 군중이 텐안먼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새벽 5시 군장(軍裝) 차림으로 톈안먼의 성루에 올라 눈앞의 군중을 내려다보았다. 문혁 시절 서열 2위였던 린뱌오는 대규모 군중 앞에서 황홀경에 빠진 채 17분간 연설을 했다. 평소 신경쇠약으로 골방에서 벌벌 떨고 있던 린뱌오는 군중 앞에선 생동의 에너지를 내뿜었다. 그는 홍위병들을 향해 낡은 것을 깨부수라며 “파사구(罷四舊)!”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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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석을 꼭 붙잡고 큰 바람과 파도를 헤쳐 앞으로 나아가자!” 당시 홍위병과 마오쩌둥의 공고한 심적 결합을 표현한 포스터/ 공공부문>


절정의 순간은 18세의 쑹빈빈(宋彬彬, 1949- )이 마오쩌둥의 왼쪽 위팔에 홍위병 수장(袖章)을 달아줄 때였다. 마오는 어린 소녀의 이름을 물었고, “쑹빈빈”이라 답하자 마오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의 빈(彬)이냐?” 되묻고 나선 “요무마(要武嘛, 무[武]가 필요하지?)”라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흘린다. 언론의 대서특필로 이 대화가 알려지자 홍위병 집단을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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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 18일 “경축 무산계급문화대혁명 백만인 대회.” 마오의 팔에 홍위병 수장을 달아주는 쑹빈빈. 얼마 후 쑹빈빈은 쑹야오우(要武)로 개명하고 홍위병의 대표로 활약한다. 이 대회가 열리기 13일 전 베이징 사대부여중 교내에서 교감 뱬중앤은 홍위병의 구타에 못 이겨 사망한다. 당시 쑹빈빈은 바로 그 홍위병 조직의 리더였기에 훗날 큰 논란에 휩싸인다./ 공공부문>


열흘 전 제8기 11차 전회에서 중공중앙이 채택한 “16조” 제 6항에는 “요용문투, 불용문투(要用文鬪, 不用武鬪)”라는 구절이 명시돼 있었다. 무력투쟁을 금지하고 글(文)로 투쟁하라는 주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요무(要武)란 한 마디로 중공중앙이 채택한 “문투(文鬪)의 원칙”을 조롱했다. 홍위병을 향해 무장투쟁에 나서라는 최고영도자의 주문이었다.

“혁명은 무죄이며, 반란은 정당하다.” 이제야 홍위병은 그 의미를 파악했다. 그들의 눈앞엔 살인까지 허용되는 무법천하가 펼쳐졌다. 학교 수업은 중단된 상태였다. 책 대신 곤봉과 몽둥이를 든 어린 학생들은 성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대신 잔혹한 학살의 경쟁을 시작했다.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23회> “반동의 후예는 반동”...홍위병, 광란의 대학살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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