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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내쇼날부터 아이와까지...70년대 레트로 기기 성지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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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서울' 운영하는 김보라·윤종후 대표

취미삼아 모았던 1970~80년대 전자기기

젊은 세대는 새롭고, 중장년층은 향수 느껴

서울 종로구 안국역 인근의 오래된 대형 빌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별세계가 나타난다. 약 50㎡(15평) 남짓의 사무실 공간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30여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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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 안국역 인근에 위치한 7080 레트로 전자 제품 숍 '레몬서울'을 찾았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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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서랍 속에 하나쯤 가지고 있었을 법한 카세트 플레이어부터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수지가 듣던 동일 모델의 CD 플레이어, 1990년대 힙합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에서 흔히 봤던 붐박스와 빈티지 턴테이블, 어느새 기억에서 잊혀버린 뚱뚱한 브라운관의 TV까지. 모두 1980년~9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추억 속의 물건들이다. 음악 재생 기능이 있는 움직이는 로봇이나 우주인의 헬멧을 연상시키는 ‘리플렉터’같은 신기한 물건도 있다. 오래전 고속버스에서 기사님들이 봤을 법한 휴대용 TV도 있다. 내셔널(파나소닉의 전신)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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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회사에서 VMD와 디자이너로 일하며 취미로 레트로 음향 가전을 모았다는 윤종후‧김보라 부부.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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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하나씩 모은 게 이만큼이 됐어요.” 1960년~90년대까지 생산되고 판매된 음향 가전 레트로 가젯 숍 ‘레몬서울’ 김보라(38) 대표의 말이다. 남편 윤종후(39) 공동대표와 함께 운영한다. 각각 국내 패션 회사에서 디자이너와 VMD로 일하다 독립해 을지로에서 개인 브랜드를 함께 운영해왔다. 13년간 쉬지 않고 일하다 지난해 조금만 쉬어보자는 생각에 일을 접고 갖고 있던 물건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다.

디자인이 예쁜 오래된 음향 가전. 두 사람이 좋아하는 물건의 공통점이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꼭 그 지역 빈티지 숍에 들러 물건들을 발굴했다. 도쿄 아키하바라 같은 전자 기기 상가와 베를린 중고 숍을 탐험하면서 ‘득템(좋은 아이템을 얻는 것)’을 많이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운영하는 잡화점에는 특히 먼지 쌓인 ‘물건’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모으다 보니 어느새 다 세지 못할 만큼 물건들이 창고에 쌓였다. 최소 300~400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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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가치가 있는 디자인이면서 실제 작동되는 기기들을 모은다. 포터블 카세트테이프 레코더.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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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쉬면서 ‘아카이브(디지털 기록물이나 파일)’를 만들자는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제품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취미가 일이 된 순간이다. 직접 보고 싶다는 요청에 예약제로 둘러보고 구매도 할 수 있는 레트로 전자 기기 숍을 ‘강제 오픈’했다.

부부가 모아 온 레트로 가전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시대를 뛰어넘어 디자인적으로 소장 가치가 있어야 한다. 둘째, 기능적으로도 흥미로워야 한다. 예를 들어 로봇인데 카세트 재생이 된다든지, 트리플 데크(세 개의 테이프를 꽂는) 붐박스라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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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봐도 세련된 디자인이 눈길을 끄는 레코드 플레이어. 사진 레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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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모은 제품들을 보고 있으면 새삼 ‘옛날 디자인이 이렇게 좋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눈길이 간다. 요즘 제품보다 세련됐다는 느낌도 든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같은 옛날 SF 영화에 등장할 법한 제품들이 특히 그렇다. 김 대표에 따르면 윤 대표 쪽이 훨씬 덕력이 세다. 일명 ‘스페이스 에이지(space age)’라고 불리는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 인간이 달에 착륙하는 역사적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다. 김 대표는 디자이너답게 예쁜 디자인 기기를 선호한다. 알록달록 색이 예쁜 카세트테이프나 녹음기 등이다. 레몬서울은 둘의 취향이 합쳐진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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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쇼날의 TV. '스페이스 에이지' 시대의 디자인이다. 사진 레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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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을 살펴보면 1970년대 전자 강국이었던 일본 제품들이 많다. 소니, 산요, 내셔널, 카시오 등 일명 ‘쇼와 레트로’라 불리는 1920년~90년대까지 일본 버블 시대에 만들어진 제품들이다. 김 대표는 “경제 호황기여서 디자인 완성도도 뛰어나고 상상력도 좋다”며 “요즘은 팔릴 것만 만드는 시대라면 당시에는 안 팔려도 일단 하고 싶은 건 다 해보자는 식으로 디자인적 발상이 뛰어나고 재밌는 제품들이 많이 나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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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한 색이 돋보이는 카세트 플레이어. 소니가 키즈용으로 내놓은 제품 라인이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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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애착이 가는 물건은 ‘옴니봇’으로 불리는 로봇이다. 1980년대 제품인데 이 역시 ‘스페이스 에이지’의 산물이다. 외관은 무려 ‘로봇’이지만 카세트테이프를 넣으면 불빛이 나오며 움직이는 다소 싱거운 기능의 귀여운 제품이다. 손님 중 한 명이 "시애틀의 한 박물관에 전시된 물건인데 여기선 팔고 있다"며 놀랐을 만큼 귀한 물건이다.

이렇게 귀한 물건을 팔다니 아깝진 않을까. 김 대표는 “아쉽긴 하지만 상자 속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물건들이 많아 생각을 바꿨다”며 “여유 있게 꺼내보고 음악도 들어보고 아껴주는 사람에게 가는 게 맞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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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재생하는 '옴니봇'의 모습. 사진 레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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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 전 오픈한 레몬서울에는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찾는다. 김 대표는 “개인적 취향이 담긴 공간이어서 소수만 관심 가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찾아준다”며 “20대는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신기한 물건이라, 30대~50대는 실제로 써봤던 추억의 물건들이라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해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MBC)’에서 배우 박정민이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장면이 방송되면서 문의가 확 늘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디자인도 좋지만 음악 한 곡을 들을 때마다 버튼을 눌러 조작하고, 판을 뒤집고, 테이프를 넣다 빼고 하는 식의 귀찮음을 즐기고 싶어 하는 것 같다”며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으로 조금은 느리게 가고 싶은 마음이 투영된 것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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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 풍경을 보며 조용히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갖췄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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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표는 “1980년대 추억의 집에 조용히 들어와 새로운 경험을 하고 갔으면 좋겠다”며 “너무 급하게 소모되지 않고 오랫동안 색깔을 유지하는 독특한 숍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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