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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해상분계선 걸고 넘어진 北… 속셈은 서해 경비계선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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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분쟁 수역 부각 뭘 노리나

2007년 NLL 남쪽에 기준선 일방 설정

2018년 9·19 군사합의서 때도 주장

‘평화수역 조성’ 구체적 합의는 안 해

1999년 주장 경계선은 설득력 떨어져

“軍 동원 반발은 인도적 차원서 무리… 언론 통해 주장 관철 의지 표명” 관측

세계일보

연평도 앞바다서 해상 정찰 실종된 해양수산부 어업지도원 A씨가 지난 22일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가운데 27일 오전 북측 등산곶이 보이는 서해 연평도 앞바다에서 해병대원들이 해상 정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27일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해양수산부 어업지도원의 시신 수색 과정에서 남측의 ‘무단침범’을 주장하며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걸고 넘어졌다.

북한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우리는 남측이 새로운 긴장을 유발할 수 있는 서해 해상군사분계선 무단침범 행위를 즉시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이번에 거론한 이 분계선은 북한이 2007년 설정한 ‘서해 경비계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북방한계선(NLL) 바로 아래쪽에 걸쳐 있다.

일각에선 1999년 9월 북한이 일방적으로 남북의 해상경계선으로 선포한 ‘조선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거론하지만, 이는 NLL 훨씬 남쪽으로 그어져 있고 서해 5개 도서의 광범위한 남단 해상이 모두 분계선 안에 들어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우리 군 당국은 1999년 해상경계선을 기준으로 할 경우 서해 5개 도서의 남단 수역을 고스란히 북측에 내어주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2018년 4월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군사회담에서 오갔던 NLL을 둘러싼 남북의 입장을 보더라도 이 같은 북측의 주장은 2007년 서해 경비계선 쪽에 더 무게가 실린다. 당시 북한은 우리 측이 ‘서해 평화수역은 NLL 기준 남북 등면적’을 요구하는 데 대해 경비계선의 인정을 주장했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측에 제시했던 공동어로수역을 포함한 지역을 줄곧 자신들의 해상 군사분계선으로 인정해달라고 한 것의 연장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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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관계자는 “북한은 2018년 9·19군사분야 합의서 작성 과정에서도 동일한 주장을 했다”면서 “따라서 이날 조선중앙통신 보도 내용은 2007년 경비계선의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북한이 이번에 경계선을 거론한 것은 남측 NLL 무력화 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주장해온 서해 경비계선의 무력화를 막기 위한 제스처란 분석이다.

또 다른 군 관계자는 “NLL 바로 아래는 북한이 2007년부터 자신들의 해역이라고 주장해왔던 곳”이라며 “지금 우리 군과 해경 함정들이 대거 동원돼 실종자 수색을 펴고 있는 만큼 군을 동원해 반발하거나, 또는 물리적으로 막기는 인도적 차원에서 무리라고 보고 언론매체를 통해 우회적으로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현재 연평도와 백령도 북방에서 북한군의 특이동향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이 9·19군사합의에서 “남과 북은 서해 NLL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 안전한 어로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군사적 대책을 취해 나가기로” 했지만 구체적인 기준에 대해서는 합의하지 않은 상태란 점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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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선언문을 펼쳐 보이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물론 남측 NLL 무력화 시도라는 분석도 있다. 서해 NLL의 경우 1953년 8월 30일 유엔군사령관이 유엔군 측 해·공군의 해상초계 활동 범위를 한정하기 위해 설정한 기준선이다. 남북 합의로 설정한 경계선은 아니었지만 남북 간의 실질적인 해상경계선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북한은 공식적으론 NLL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NLL을 ‘서해 열점수역’, ‘서해 분쟁수역’ 등으로 지칭해왔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부속 합의에서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는 데 합의하며 사실상 NLL을 존중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는 듯했지만, 이후에도 북측의 NLL 인정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됐다.

북한의 NLL 무력화 시도가 본격화된 것은 1999년 9월 NLL 남쪽에 일방적으로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선포하면서다. 이어진 제9차 판문점 장성급회담에서는 ‘NLL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2000년 3월에는 백령도, 연평도 등으로 출입할 수 있는 폭 2개의 수로를 제시하면서 ‘서해 5개섬 통항 질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햇볕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이때를 전후로 1999년 6월 제1 연평해전, 2002년 6월 제2 연평해전이 발발했다. 이후 북한은 2006년 5월 제4차 남북 장성급회담에서 소청도~연평도 사이에 NLL 이남에 새로운 경비계선 설정을 주장했다. 2007년 들어 북한은 남북 공동어로구역 및 평화수역 범위의 남단 경계선이 이 경비계선이고, 북단 경계선을 NLL로 하는 데 동의했다. 이전 서해 해상군사분계선 주장에서 한발 물러선 것이다.

박병진 기자 worldp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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