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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밀레니얼 톡] “대법관 중 여성이 몇 명이어야 충분하냐”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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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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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가 치열한 생을 마감했다. 하버드 로스쿨 입학 당시 학장으로부터 “남학생 자리를 빼앗은 잘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야만 했던 이 여성은, 아직 남아있는 차별과 편견, 특히 성별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애써온 생애를 통해 그 답을 보여줬다. 긴즈버그는 1996년 남성만 입학을 허용한 버지니아 군사학교 정책이 수정헌법 제14조 평등조항에 위배된다는 판결문을 작성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07년에는 여성 직원이 남성 직원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음에도 법정기한을 경과했기에 이를 다툴 수 없다는 판결에 소수 의견을 내고, 여성 직원이 임금 차별 사실을 인지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법 개정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미 의회는 임금 주기마다 제소 기한이 새롭게 부여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런 그의 삶은 ‘세상을 바꾼 변호인(On the Basis of Sex)’라는 영화로 제작되었을 만큼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긴즈버그는 대법관으로 임명된 1993년부터 지금까지 판결문을 통해 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그녀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다음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대법관 중 여성이 몇 명이어야 충분하냐는 질문에 ‘전부’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놀라자 “대법관 모두가 남자일 때에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긴즈버그의 날카로운 비판은 비단 미국 연방대법원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우리 대법원을 거쳐간 130여 명 대법관 중 여성은 단 7명. 그나마 여성 대법관 7명 중 3명은 2017년 7월 이후 임명된 이들이다. 2020년 현재 추계 인구는 여성 2583만4842명, 남성이 2594만5737명으로 거의 50대50 비율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사법부 핵심인 대법원은 여성은 3명, 남성이 11명이다.

조선일보

조은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성범죄 사건 등 주로 여성이 피해를 입는 사안에 있어 판결 내용이 국민 법 감정과는 어긋나는 것도, 사법부의 남초 현상 때문이라는 비판이 있다. 물론 단순히 대법관의 생물학적 성비를 1대1로 맞추는 것이 만능 해결책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법원의 구성이라는 기본적인 부분에서조차 다수와 소수가 극명히 나뉜다면, 법해석의 기준이 되는 대법원 판례가 얼마나 더 다양한 지점을 고려하고 국민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1948년 사법부 출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새로운 밀레니엄이라는 2000년에도 3.1%에 불과했던 여성 판사 비율은 올해 비로소 30%를 넘었다. 여성들 교육 기회와 사회 진출이 확대된 이후로는 그 비율이 빠르게 증가하는 걸 볼 수 있다. 긴즈버그는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 달라는 것뿐입니다.”

2012년 전수안 전(前) 대법관은 퇴임사를 통해 여성 법관들에게 “언젠가 여러분이 전체 법관의 다수가 되고 남성 법관이 소수가 되더라도, 여성 대법관만으로 대법원을 구성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전체 법관 비율과 상관없이 양성 평등하게 성비 균형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는 대법원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상징이자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헌법기관은 그 구성만으로도 벌써 헌법적 가치와 원칙이 구현되어야 합니다”라고 당부했다. 대법관 앞에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수식어가 거추장스러운, 그래서 더 다양한 헌법상 가치가 구현된 대법원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은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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