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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일사일언] 사랑이 비결은 아닙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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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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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만 열면 계절을 알려주는 꽃이 피는 정원이 있는 집, 모든 사람의 꿈이다. 마당 있는 집을 호시탐탐하던 나는, 10여 년 전 좋은 집이 나타나 얼른 이사를 갔다. 마당에는 전에 살던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심어 놓은 꽃들이 만발했다. 매화, 산딸나무, 찔레가 피고 졌고 5월에는 때죽나무 꽃이 피어 온 동네에 향기가 진동했다. 아, 이거야말로 꿈에 그리던 집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꽃이 죄다 흰색이었다. 수국, 철쭉, 튤립, 글라디올러스, 백합, 수선화도 모두 흰색 꽃만 피었다. 일 년 내내 서로 다른 꽃이 피고 졌지만 마당은 늘 흰색으로 빛났다. 동네에 정원 좀 가꾼다는 부인들이 몰려 와 이 집은 멀리서 봐도 빛난다고 호들갑을 떨곤 했다.

조선일보

이지유 과학 칼럼니스트


다음 해가 되니 문제가 생겼다. 꽃송이가 적게 달리고 비실비실하더니 그다음 해에는 꽃이 절반도 피지 않았다. 정원사를 수소문해 무엇이 문제인지 물으니, 원래 흰색 꽃은 관상용으로 만든 원예종이라 관리하기가 어렵다며 아주 간단한 처방을 내려주었다. “비료를 주세요!”

유학까지 다녀온 정원사는, 굵은 철사로 만든 거대한 통에 낙엽과 폐지를 차곡차곡 담아 다음 해에 쓸 거름을 만드는 법을 아주 자세히 설명해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냥 사서 쓰셔도 돼요!”

나는 정원사가 추천해준 비료를 사서 낑낑거리며 들고 와서 마당에 훌훌 뿌리고 땅에 납작 엎드려 정성스럽게 손으로 펼쳤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며 이 집 꽃이 예전만 못하다고 한마디씩 하는데, 아마 내가 있는 줄 몰랐나 보다. 내가 벌떡 일어나니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이집 꽃은 어쩜 이렇게 하얗고 예뻐, 비결이 뭘까 하고 말을 바꾸더니, 비결이 뭐겠어, 사랑을 듬뿍 주시는 거겠지 답하고는, 서로 보고 호호호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나는 뭔가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주먹 하나를 들고 뒤통수를 노려보며 나직하게 외쳤다. “비결은, 비료죠!”

[이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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