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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33]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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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역 북부버스정류장 가로수의 등이 반질반질하다

사람들이 등을 기대고 무언가 기다렸다는 말이다

어느 날 내가 그러고 있었듯이

몇몇은 등을 기대고 서서 떠나가는 버스를 배웅했을 것이다

더러는 담배를 물고 더러는 구두코나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반질반질한 것이 등이 아니고 품이라면

가끔은 가로수도 누군가 기대었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거나 움켜쥔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상학(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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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일은 움직이는 일이므로 ‘흔적’을 남깁니다. 그 무늬가 끝내 아름답기를, 선하기를 원하고 노력하고 기도합니다. ‘일등’이 아니어도 그보다 아름답고 선하다면 찬양합니다. 모든 흔적에 대한 공동체의 마음의 기록이 역사일 겁니다. 이 시는 버스정류장 ‘가로수의’ ‘반질반질한’ ‘등’에서 삶을 읽습니다. 나아가 한 시대를 읽습니다. 버스가 드문드문 오는 ‘북부’ 광장의 정류장이니 거기 반질반질 새겨진 ‘기다림’의 ‘흔적’ 속으로 들어가 보면 ‘내’ 지나간 시간과 함께 이웃의 애잔한 모습들이 비칩니다. ‘더러는 담배를 물고 더러는 구두코나 내려다보’는 영상이 거기 있습니다. 무언가 참고 참으며 잠시 등을 기댄 모습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몰아쳐 마침내 ‘품’을 불러냅니다. 그리하여 ‘가슴을 치거나 움켜쥔’ 일이 ‘품(가슴)’에는 있었음을 가쁘게 제시하며 한 ‘시대’의 북을 두드립니다. 두어 세대 선배 백석(白石)이 ‘흰 바람벽’에 당대의 ‘울음’으로 새겨 넣었듯이. 시의 정치적 의미가 그러할 겁니다. ‘가슴을 치거나 움켜쥐’는 사연이 없기를 당대의 정치는 응답해야 합니다. 사소한 저 ‘흔적’의 의미를 차갑게 식어버린 그들의 ‘품’에 제시합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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