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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영상보다 무서운 ‘소리’, 4DX 영화관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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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유튜브 공포크리에이터 ‘돌비’

협업으로 신개념 콘텐츠 선봬

유튜브서 공포 콘텐츠 꾸준히 인기

팟캐스트·오디오클립 청취도 늘어

귀신이야기 문화, 새 플랫폼으로


한겨레

<공포체험라디오 포디엑스> 장면. 씨지브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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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려고 누운 사내의 귀에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있는 방에 누가 왔나?’ 으스스한 느낌에 눈을 뜬 사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기괴한 분위기의 여자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옆에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지난 18일 저녁 서울 씨지브이(CGV) 용산아이파크몰 포디엑스(4DX) 상영관. 이야기에 몰입하던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앉아 있던 의자가 갑자기 흔들리고, 목 받침대에서 바람이 슉~ 나와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놀이공원 귀신의 집에서나 느낄 법한 오싹함이었다.

이날 상영한 건 영화가 아니라 <공포체험라디오 포디엑스>. 의자가 움직이고 물·바람·향기 같은 특수효과가 나오는 씨지브이 포디엑스와 유튜브 공포 크리에이터 돌비가 협업한 신개념 콘텐츠다. 돌비가 무서운 이야기를 낭독하거나 무서운 사연을 전화 인터뷰로 듣는 오디오 중심의 유튜브 콘텐츠에다 간단한 삽화 영상과 특수효과를 더해 완성했다. 지난 16일 개봉해 하루 1회 상영 중이다.

이날 상영관을 찾은 10여명의 관객은 대부분 10~20대였다. 고1인 조민주양은 “평소 공포영화와 괴담을 좋아해서 왔는데, 오디오 위주 콘텐츠인 줄은 몰랐다. 그런데 소리가 더 상상력을 자극해서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유튜브에서 이 채널을 찾아보려 한다”고 말했다. 함께 온 친구 정윤서양은 “공포영화를 싫어하지만, 친구 때문에 왔다. 영화라면 무서운 장면에서 눈을 가리면 되는데, 이건 눈을 감아도 귀로 계속 들려 더 무서웠다”고 털어놨다.

씨지브이 포디엑스가 색다른 시도를 한 데는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이 컸다. 포디엑스에서 주로 상영하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개봉이 대거 연기됐기 때문이다. 새로운 걸 찾던 포디엑스 기획팀의 눈에 들어온 건 공포 콘텐츠였다. 씨지브이 관계자는 “유튜브에서 공포 콘텐츠가 유행하는 현상을 보고, 이를 큰 화면과 음향에다 특수효과까지 곁들여 보여준다면 관객들이 즐거운 공포를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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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왓섭! 공포라디오>. 팟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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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잃어버린 여름’을 겪으며 개봉관에선 공포·스릴러 영화가 크게 힘을 쓰지 못했지만, 유튜브에선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포라디오’ 콘텐츠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유튜브에서 공포라디오 채널을 검색하면 구독자 18만명의 <공포라디오0.4MHz 쌈무이>, 구독자 17만명의 <왓섭! 공포라디오>를 비롯해 수십개의 채널이 뜬다. 유튜브 생태계에서 공포라디오가 하나의 장르처럼 인식될 정도다.

오디오 콘텐츠인 팟캐스트도 마찬가지다. 국내 최대 팟캐스트 플랫폼 팟빵에 등록된 공포·미스터리 분야 방송은 100개 안팎(8월 기준)이다. 팟빵 전체순위 100위권 안에 <왓섭! 공포라디오> <브레이든의 무서운 라디오> <80스튜디오 무서운 이야기 공포라디오> 등 3개가 올라 있다. 지상파인 <에스비에스>(SBS) 라디오가 팟캐스트로 만든 <미스테리 곡>이라는 채널도 있다. 팟빵 관계자는 “공포·미스터리 분야 방송의 올해 1~8월 재생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23% 늘었다”고 전했다. 팟빵은 공포 콘텐츠의 인기에 주목해 지난 8월 오리지널 콘텐츠 <오디오 괴담 제물>을 선보이기도 했다. 스테레오 사운드로 제작해 몰입감을 높인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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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빵 오리지널 콘텐츠 <오디오 괴담 제물>. 팟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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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선 <채티 오디오 드라마 괴담>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지난해 여름 방송한 시즌1은 누적 재생수 350만회를 넘겼고, 올해 7월부터 방송 중인 시즌2도 벌써 누적 재생수 110만회를 넘겼다. 6~8월 방송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tvN)에서 에필로그로 나왔던 무서운 이야기도 같은 제목의 오디오 동화 채널로 개설돼 인기를 얻었다. 네이버 관계자는 “오디오북 <공포의 ASMR> <공포의 기록> 등도 반응이 좋다”고 귀띔했다. 오디오북 서비스 윌라 관계자도 “공포·스릴러 분야 콘텐츠의 7월 재생시간이 전달보다 15% 느는 등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공포라디오 콘텐츠가 인기를 얻는 건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귀신 이야기’ 문화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나 친구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며 놀던 추억이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공포체험라디오 포디엑스>를 기획한 관계자는 “어릴 적 친구끼리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항상 나오는 레퍼토리가 귀신 이야기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지상파에서 <토요 미스테리 극장> <이야기 속으로> 같은 괴담 프로나 여름에 ‘납량 특집’을 방송했는데, 이제는 그런 콘텐츠가 유튜브로 넘어갔다. 그래서 이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시각 대신 청각에 의존할 때 효과가 극대화되는 공포 콘텐츠의 특성도 한몫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책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 책을 읽은 독자가 영화를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책을 보며 상상한 것과 달라서다. 시각적으로 보면 상상력이 제한되는 데 반해, 청각적으로 들으면 그 한계가 사라진다. 무서운 얘기를 귀로 들으면 개개인이 가장 무서운 걸 상상하기 때문에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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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공포라디오0.4MHz 쌈무이>.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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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으로 다가감으로써 덜 자극적이면서 적당한 긴장과 공포감을 주는 게 인기 요인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2012년 아프리카티브이에서 <공포라디오0.4MHz 쌈무이> 방송을 시작한 1세대 공포 크리에이터 쌈무이는 전문 성우 못지않은 나긋나긋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무서운 이야기를 읽는다. 그는 “자극적으로 확 놀라게 하는 게 아니라 재밌고 편안하게 무서운 이야기를 즐길 수 있도록 목소리 톤을 연구하고 연기 공부까지 한다. 적당한 긴장과 공포를 느끼며 방송을 듣다 보니 잠도 잘 와서 불면증을 고쳤다는 분들도 많다”고 전했다.

공포라디오는 온라인에 떠도는 작가 미상의 괴담을 재구성해 낭독하는 형태로 출발했다. 쌈무이는 “인터넷 방송 초창기에 낮에 우연히 읽은 무서운 이야기를 저녁 방송에서 했더니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아예 공포라디오 콘셉트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후 채널의 인기가 올라가자 제보가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출판사나 괴담 작가가 자신의 글을 방송해달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쌈무이는 공포영화 <장산범> <주온> <잔예: 살아서는 안 되는 방> 등의 제안으로 컬래버레이션 콘텐츠를 만들기도 했다.

유튜브 채널 <돌비공포라디오>를 운영하는 돌비는 처음엔 자신이 낭독하다가 얼마 뒤 시청자가 직접 자기 얘기를 들려주는 형태로 바꿨다. 돌비는 “귀신을 보는 무당뿐 아니라 의사, 전직 아이돌, 방송 카메라맨, 화물트럭 기사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제보를 해온다. 자신이 겪은 실화를 직접 얘기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더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돌비는 일주일에 다섯번씩 제보자와의 인터뷰를 유튜브와 아프리카티브이 생방송으로 진행하는데, 5000~6000명이 볼 정도로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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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공포라디오 무읽남>.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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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운영 노하우를 알려주는 채널 <유튜브랩>을 운영하는 박현우 피크닉콘 대표는 최근 <공포라디오 무읽남> 채널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기존 채널과 달리 무서운 이야기를 낭독하면서 삽화와 자막을 넣어 눈으로도 볼 수 있게 했다. 박 대표는 “유튜브 문법에 익숙한 초등학생과 18~24살이 좋아한다”고 전했다. 최근엔 <깨야의 공포툰> <금도깨비툰> 등 무서운 이야기와 만화를 결합한 영상툰도 인기다.

공포라디오가 대중 콘텐츠로서 대단히 폭넓은 인기를 얻긴 힘들어도 마니아들의 꾸준한 관심 덕에 더 확장할 것으로 보인다. 박현우 대표는 “공포라디오는 호불호가 갈리는 콘텐츠여서 관심 없으면 잘 안 보지만, 관심 있는 사람은 충성도가 높다. 그래서 시청 지속시간이 다른 유튜브 콘텐츠보다 훨씬 길어 수익성 면에서도 전망이 밝다. 앞으로 더 많고 다양한 공포 콘텐츠가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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