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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서울 자문밖 주민들의 별난 야심 "세상에 둘도 없는 아트밸리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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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이항성 작가 집 미술관 추진

미술품 소장가의 집 '운심석면'도

관과 주민, '예술동네 만들기' 협업

중앙일보

서울 평창동에 자리한 미술품 소장가 김용원씨의 작품을 한자리에 품은 '운심석면'. 이 공간과 콜렉션을 종로구에 기증해 미술관 건립을 추진한다. [사진 종로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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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동네가 세상에 둘도 없는 문화예술 동네가 될 수 있을까. 서울 평창동, 부암동, 구기동, 홍지동, 신영동에 거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오랫동안 꿈꿔오던 예술동네 만들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선 그 첫걸음으로 평창동에 자리한 '물방울 화가' 김창열(91) 작가, 한국 판화의 선구자 고 이항성 작가(1919~1997)와 그의 아들 이승일 (74) 작가, 미술품 컬렉터인 김용원(85·도서출판 삶과 꿈 대표)의 집 등 세 곳이 줄줄이 기념미술관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지난 23일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김영종 종로구청장과 김창열 화백의 아들 김시몽 고려대 불문과 교수 부부, 이항성 화백의 아들이자 판화가인 이승일 홍익대 판화과 전 교수 부부, 김용원 미술품 소장가의 부인 신갑순 여사와 딸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모였다. 이날 이들은 종로구(구청장 김영종)와 '구립미술관 건립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협약은 "구립미술관 건립을 차례로 추진하고, (작가·소장가 가족은) 작품 100점 이상을 (종로구에) 무상으로 기증하며, 이들의 자택을 활용한 구립미술관 건립을 위해 상호 협력한다'는 내용이었다. 협약대로 일이 잘 이뤄진다면 한 동네에 김창열미술관, 이항성미술관, 김용원미술관(가칭)이 옹기종기 자리 잡게 된다. 종로구는 이들 자택을 보상매입(다른 곳으로 옮겨가 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100점 이상의 작품과 소장품을 기증받는 것이다.

해외엔 예술가가 살던 집과 작업실을 정부가 사들여 미술관으로 조성한 사례가 적지 않다. 파리 로댕미술관과 들라크루아 미술관 등이 그 예다. 로댕미술관은 로댕이 만년에 작업했던 저택으로, 로댕은 이곳을 미술관을 만들어줄 것으로 요청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정부에 자신의 모든 작품을 기증했다. 들라크루아 미술관도 들라크루아가 만년에 살던 집으로 로댕미술관보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파리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는 명소 중 하나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구립미술관 1호 박노수미술관과 2호 고희동미술관을 통해 예술가의 집이 어떻게 많은 관람객과 소통하는 문화 공간이 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며 "앞서 두 미술관을 운영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김창열 미술관부터 순차적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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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화가' 김창열의 서울 평창동 자택. 1980년대 중반 재미건축가 우규승씨가 설계했다. [사진 김시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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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미술관 건립이 추진될 김창열의 집은 작가가 1980년대 중반에 짓고 줄곧 살아온 곳으로, 이 집 지하의 널찍한 작업실에서 그의 유명한 '물방울 그림'이 다수 제작됐다. 재미 건축가 우규승(81) 씨는 1988년 환기미술관 설계에 앞서 이 주택을 먼저 설계했다. 이 집이 미술관으로 조성되면 한국 미술사뿐만 아니라 건축사에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 공간이 공공의 자산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 작가의 아들 김시몽 교수는 "지하에 자리 잡은 아버지 화실은 간접적으로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라며 "아버지가 작품을 기증해 설립된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이 있지만, 이곳은 아버지가 살며 작업하던 집이란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곳이 서울의 빛나는 명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항성·이승일 작가 부자(父子)가 살아온 자택의 의미도 남다르다. 1950년대 석판화 전을 처음 연 이항성 작가는 1975년부터 파리에서 20여년간 활동했으며 문화교육 출판사를 설립해 미술 교과서 제작과『세계미술 전집』편찬 등으로 미술문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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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항성 작가가 살던 곳이자 현재 이승일 전 홍익대 판화가 교수가 살고 있는 집. 이승일 교수는 이 공간과 소장품을 종로구에 기증할 예정이다. [사진 종로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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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일 홍익대 전 교수는 "아버님께서 한국 미술계에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돌아가신 후 사람들로부터 잊히고 있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며 "아버지의 작품과 판화 수집품, 출판 관련 자료 등을 모두 기증해 미술 애호가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술관을 위해) 제가 정든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의 작품과 제 작품, 그리고 제가 정성 들여 가꿔온 정원이 미술관에 간직돼 더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원 대표와 그의 딸 김진영 교수는 평생 모아온 예술품과 2년 전 이를 위해 지은 공간 '운심석면(雲心石面·구름의 마음 돌의 얼굴이란 뜻)'을 기증한다. 김 교수는 "한 예술가가 살았던 집과 달리 한 소장가가 수집해온 다양한 작품을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일은 어떤 면에서 더 세심한 안목과 운영이 필요하다"며 "한편으론 (운영·관리가)걱정되지만, 이번 구립미술관 추진이 새로운 문화 행정 모델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동참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이번 협약은 김 구청장의 선진적인 문화 마인드와 문화공동체에 대한 열망이 남다른 지역 문화인에 대한 신뢰가 있어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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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구립미술관 건립을 위한 업무 협약을 맺은 작가와 소장가의 가족들. 왼쪽부터 김지인, 김시몽, 이승일, 양영숙, 김진영, 신갑순씨. 맨오른쪽은 김영종 종로구청장.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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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평창동을 비롯해 구기동, 부암동, 신영동, 홍지동 등을 아우르는 '자문밖' 동네는 서울 한가운데에서도 단독주택이 많고, 그 사이사이 자리한 갤러리와 미술관 등이 5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예술공간이 많은 곳이다. 김창열 작가뿐만 아니라 윤명로(84), 김구림(84) , 이종상(82) 등 많은 원로작가가 거주하고 있다.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화가 임옥상·박영남도 주민이다. 구성원들이 남다른 만큼 앞으로 더 많은 기념미술관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 이순종 자문밖문화포럼 이사장(전 서울대 미대 학장)은 "작가와 소장가가 살던 공간을 내놓고 작품을 100점 이상 관에 무상 기증하는 이번 협약 체결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며 "앞으로 이 기념미술관들은 그들의 삶과 작업과 작품이 응결된 예술명소,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밸리가 되는 데 큰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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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평창동 '자문밖아트레지던시'에서 장르를 넘어 협업할 젊은 아티스트들.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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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종로구와 주민들의 협업은 구립 미술관 건립 추진이 전부가 아니다. 종로구는 자문밖포럼과 함께 지난 23일 젊은 아티스트들을 위한 거점 공간도 출범시켰다. 이른바 '자문밖아트레지던시'다. 서류와 면접 심사를 거친 작가 11개팀 14명이 입주한 이 레지던시엔 미술, 건축, 미디어아트, 연극영화, 음악, 엔지니어링 등 다양한 분야 예술인들이 포함됐다. 이순종 이사장은 "자문밖아트레지던시를 통해 자문밖 예술자원에 젊은 예술가들을 연결하며 지역과 소통하는 프로그램을 활성화해 나갈 것"이라며 "자문밖문화축제와 예술학교 운영 등으로 이곳을 예술로 특화해 문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이 꼭 방문하고 싶어하는 동네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은주 문화 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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