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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엄마니까 착하게 살려고 했는데, 엄마라서 싸워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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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윤정인] 나는 어쩌다 보니 시민단체 활동가로도 살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엄마도, 과학자도, 내가 다 '해 먹으려’ 결심하게 된 계기, 바로, '정치하는 엄마들’의 '하마’로 살게 된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 나를 갈아 넣으며 일했는데, 회사의 평가는 가혹했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나는 아이 낳은 후 기업에서 직업 과학자로 삶을 시작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나이 대비 연봉이 좋았다.

다만, 남편과 같은 직장,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한 바람에 눈떠서 잠잘 때까지 내리 배우자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과,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달이 백만 원가량의 돌봄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것과, 입사 6개월 만에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말았다는 단점이 있으나, 그래도 풍족한 용돈으로 씁쓸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기에 괜찮았다.

그런데 나는 그 회사에 다니는 동안 바다 한가운데 놓인 어떤 섬에 고립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 매일 윗선의 테스트를 받는 느낌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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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생존'하려면 담배 피우는 무리에 끼어야 한다고 했다. 싫었다. 나는 그냥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베이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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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우리가 한 일은 서로 이야기를 한 것뿐이었다. 온갖 사연이 다 튀어나왔다. 엄마인 건 같은데 이름도, 나이도, 엄마이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모두 달랐다. 그날 대화를 나눈 후 우리가 함께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엄마가 된 후 우리는,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훌륭한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발버둥을 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직장 다니는 이들은 '여성’, '엄마’라는 현실이 핸디캡이 될까 싶어 실적에 연연했고,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중앙에서 점점 밀려나는 일을 경험했다. 겉으로는 '자발적 퇴사’였으나, 그 퇴사까지의 과정이 전혀 자발적이지 않았던 경험들이 공유됐다.

왜 우리는 '평범한 직장인’이 될 수 없었을까. 우리는 왜 늘 뛰어난 직장인이어야 했을까. 언니들을 만난 후 이 사실을 깨달았고, 비로소 자책하는 일을 멈출 수 있었다. 자책 대신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고, 그 질문을 떠올리면 '빡쳤다’.

'아니 왜, 나는 평범한 연구자로 살면 안 돼? 왜 나는 엄청난 기대치를 충족해야 하는, 비범한 사람이어야 하지?’

왜 나를 그렇게 타이트하게 평가했는지, 가장이 아니니 당장 그만둬도 문제없겠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겨댄 대표에게 따지지도 못한 게 그렇게 '빡’쳤다. 빡쳐서, 하마가 됐다.

어쩌다 보니 전직 '전문직’이 총출동한 4월 22일, 그리고 두 번째 만남 5월 13일. 비슷한 사연으로 다 같이 '빡쳤던’ 우리는 세 번째 만남이 있었던 6월, 비영리 임의단체를 출범했다.

마침 엄마였는데, 전직 국회의원이고, 전직 마케팅 전문가였고, 전직 과학자이자 전직 연예인 팬클럽 운영자였고, 전직 기자였고, 전직 디자이너였다. 그날 모인 우리들의 경력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아니 왜 이런 사람들이 여기에 있어?"라고 할 정도였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무궁무진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다. 고립된 섬에 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옆 섬에 사는 동료를 만난 기분이었달까. 어떤 언니는 이것을 '육아둥둥섬’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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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니까'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 그렇게 산다고 좋아지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마'가 됐다. ⓒ베이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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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는 원래 '파이터’였다. 대학-대학원 생활을 거치며, '남초 집단’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다 보니, 대학교 1학년 때보다 성질머리가 많이 죽긴 했지만, 굳이 싸움을 피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엄마가 된 뒤, 싸우는 게 싫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위협받을까 싶었고, 내가 타인에게 나쁜 마음을 먹으면 그게 내 아이에게 업보처럼 올까 무서워, 항상 착하게,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고 좋아지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정치하는엄마들’이 되기로 했다. 왜 우리는 양육자로도, 직업인으로도 사는 게 어려운지, 왜 우리는 늘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서야 하는지, 함께 물어볼 사람들이 생겨 묻기로 했다.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하마’라고 부른다. '정치하는엄마들’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는’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하는 엄마’, '하마’라고 칭한다.

하마는 매력적이다. 우성 야행성이다('육퇴’를 즐기는 양육자들처럼). 잡식성이고(애 키우다보면 늘 배가 고픈 것처럼), 영역 침범에 예민하며, 아주 무시무시한 동물이다. 그게 '육아둥둥섬’에 표류 중인 양육자들의 현실과 왠지 비슷하다 느꼈다.

평소엔 가만히 있다가도, 빡치면 흉폭해진다는 점이 특히 그렇달까. 내가 정치하는 엄마가 된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평범히 살고 싶어서다. 비범한 능력을 갖춘, 대단한 능력의 과학자로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저 엄마이길, 과학자이길 바란다. 엄마로도 살 수 있고, 직업 과학인으로도 사는 삶이 평온하길 바란다.

이런 삶이 당연해져야 왜 나에게 다른 동료들보다 더 많은 평가가 따라야 했는지, 왜 나에겐 더 많은 능력이 필요했는지 다시 질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하루 평범한 엄마, 과학자가 되고 싶다. 이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칼럼니스트 윤정인은 대학원생엄마, 취준생엄마, 백수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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