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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실적 내려고 펀드 불완전판매 은행원, 앞으론 그러다 성과급 뺏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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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금융당국 ‘비예금 상품 판매’ 가이드라인 도입

"은행 핵심성과지표(KPI)에 ‘통일’을 넣으면 남북 통일도 이뤄질 거다.”

금융권에서 유명한 농담이다. 그 정도로 KPI가 무섭다는 뜻이 담겼다. KPI란 은행이 직원들의 성과를 책정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채점표’다. 예컨대 펀드를 많이 팔면 몇 점, 신규 고객을 유치하면 몇 점을 줄 지 적어두는 식이다.

지난해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와 라임자산운용 부실 펀드 사태가 터진 배경에는 고객보다 은행 이익을 앞세운 KPI가 있었다는 지적이 많았다. 은행원들이 실적을 내려면 앞뒤 안 따지고 펀드 등 금융상품을 팔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불완전 판매 사고가 터졌다는 지적이다.

앞으로는 이 같은 문제가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은행권과 금융감독원은 28일 ‘은행 비예금상품 내부통제 모범규준’을 만들어, 성과 압박 위주의 KPI를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연내 각 은행 내규에 반영돼 시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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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은행권 KPI는 고객 보호보다 단기 영업 실적 위주에 치우쳐 있었다./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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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 판매 저지른 은행원, 성과급 빼앗긴다

지난해 금융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신한·KB국민·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KPI에서 고객 수익률 배점 평균은 1.2%에 불과했다. 아예 0%인 은행도 있었다. 반면, 전체 배점 가운데 80% 이상이 수익·매출·고객 유치 등에 배정됐다. 고객 대신 은행 영업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말이다.

이 같은 문제가 지적되면서, 은행들은 펀드 같은 비(非)예금 상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KPI를 지나치게 단기 영업 실적 위주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우선 특정한 상품을 얼마나 팔았는지를 KPI에 반영하는 행위를 제한하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은행 본점이 미는 특정 상품의 판매 실적을 KPI에 담는 일이 흔했다.

예컨대 DLF를 얼마나 팔았는지 KPI에 담아 직원을 평가했고, 성과 압박에 몰린 직원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고객 성향을 따지지 않고 DLF 같은 고위험 상품을 판매한 것이다. 앞으로 KPI에서 특정 상품 판매 실적이 빠지면, 직원이 고객 성향에 맞춰 고위험·저위험 상품 등을 섞어 팔 수 있을 전망이다.

불완전 판매를 저지른 직원에 대한 불이익도 강화된다. 은행권은 불완전 판매를 성과 평가 시 감점 요소로 반영하고, 그 비중을 지금보다 높이기로 했다. 현재 은행권 KPI에 불완전 판매 관련 감점은 총점의 2%가량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반면 상품 판매 실적은 15% 정도다. 직원 입장에서는 불완전 판매를 저지르더라도 많이 판매하는 게 유리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불완전 판매가 확인되면 성과급을 환수할 수 있는 규정도 마련하기로 했다.

고령자에게 부적합 확인서를 받고 판매하면 그 성과를 평가에 반영하지 않거나 일부만 반영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또 고객에게 판매한 상품의 수익률이 높을수록 직원도 좋은 평가를 받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예컨대 국내 주식 펀드를 판매한 직원은 해당 펀드가 코스피(KOSPI) 지수 대비 얼마나 잘했는지에 따라 점수를 받는 식이다.

◇사실상 원금 보장? ‘원금 손실 가능성’ 못박은 비예금상품 설명서 줘야

DLF·라임·옵티머스 등 사모펀드 사태 때 투자자들은 ‘사실상 원금 보장’ ‘확정금리형 상품’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안전하다’ 같은 표현에 속아 넘어갔다. 원금 손실이 날 수 있는 비예금 상품인데도, 은행에서 가입한다는 이유로 마치 예금 상품처럼 안전한 듯 착각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행권은 앞으로 ‘비예금상품설명서’라는 걸 도입하기로 했다. 판매하는 상품이 예금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고, 그에 따른 위험을 예금 상품과 비교해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예컨대 ‘본 상품은 가입 시 일반 예금상품과 달리 원금의 일부 또는 전부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명시해두는 한편, ‘이 상품은 예·적금과 다르며, 은행이 판매하지만 손실 위험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는지 체크하는 식이다.

비예금상품을 판매하는 직원 앞에는 표지판을 설치하거나, 관련 명찰을 달게 하는 등 ‘비예금 상품을 판매하는 직원’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전문성 없는 일반 창구 직원이 펀드 가입을 권유하는 등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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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도입될 비예금 상품설명서 예시/금융감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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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예금 상품 판매하려면 이사회에 보고해야

앞으로 은행들은 임원급 협의체인 ‘상품위원회’를 꾸려 비예금 상품 관련 정책을 총괄하게 된다. 여기에는 리스크관리담당 임원(CRO), 준법감시인, 소비자보호담당 임원(CCO) 등을 포함된다.

이들은 어떤 상품을 팔 건지 선정하고, 판매 및 사후관리 과정을 총괄한다. 위원회 운영이 공정하도록 영업담당 임원의 회의주재를 제한하고, 위원회 운영은 영업과 무관한 조직이 담당하도록 한다. 위원회 심의결과는 대표이사 및 이사회에 보고해야 하며, 관련자료 등은 10년간 보관한다.

엉뚱한 상품을 팔지 않도록 상품 심의 과정도 강화한다. 상품위원회는 판매할 상품의 위험도, 복잡성, 판매 직원의 상품 이해도 및 전문성 등을 고려하여 판매채널을 미리 지정한다. 예컨대 ‘이 펀드는 위험성이 높으니 일반 영업점에는 안 팔고 PB센터에서만 팔겠다’고 결정하는 식이다. 또 라임·옵티머스 같은 ‘불량 운용사’ 상품을 파는 일이 없도록, 금융상품 제조사의 건전성·리스크 관리 능력 등을 평가해야 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DLF 사태 이후 은행권은 상품 판매절차 및 내부통제를 개선하고자 했으나, 별도 참고할 만한 기준이 없어 애로가 있었다”면서 “이번 모범규준은 은행권이 금융감독원과 함께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 마련한 만큼 은행권의 모범관행(best practice)으로 활용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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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금리연계형 파생결합펀드(DLF)’에 판매한 투자자들이 정부서울청사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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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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