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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장은수의이책만은꼭] 인간, 심판 당하려 사는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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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비극 못 막지만 희망도 버리지 않아

자신을 심판 말고 성공과 실패를 수용하라

세계일보

현대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장편소설 ‘네메시스’(문학동네)는 ‘죄책’의 문제를 다룬다. 소설의 중심에는 ‘인간은 자신이 뜻하지 않은 잘못까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네메시스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이다.

작품 배경은 1944년 미국 뉴어크의 한 유대인 마을, 주인공 버키 켄터는 용기와 희생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참전하려 했으나, 지독한 근시 탓에 군대 대신 놀이터 감독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어느 날, 소아마비를 일으키는 폴리오바이러스가 마을을 덮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아이들이 죽어 간다. 소명감에 불타오른 버키는 아이들을 구하려 애쓰지만 희생자는 자꾸 늘어만 간다. 하나같이 착하고 명랑하고 예의 바른 아이들이다. “이게 어디가 공정한 거요? 왜 비극은 늘 그것을 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을 덮치는 거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묻는다. 버키는 답한다. “모르겠습니다.”

인디언힐이라는 산속 캠프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연인 마샤가 회의에 빠진 버키한테 자신과 함께 있자고 제안한다. 안전한 장소에서 연인과 사랑을 나눌 것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들과 고통을 함께할 것인가. 갈등하던 버키는 아이들을 떠나서 연인 곁으로 간다. 그러나 이 탓에 버키는 가책에 사로잡힌다. 안온함이 늘 행복의 보증 수표는 아니고, 사랑이 항상 삶의 답은 아니다. 수치를 이기지 못한 버키는 공허에 빠진다.

얼마 후, 아이 하나가 갑자기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버키도 곧이어 발병한다. 버키 자신이 아이들을 쓰러뜨린 ‘보이지 않는 화살’이었다! 버키가 아이들을 구하려 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아이가 죽어 간 것이다. 진실은 반대일 수도 있다. 병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버키는 병들었을지 모른다.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투 끝에 살아난 버키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아이들 죽음에 인과응보가 있음을 누군가 증명해야 한다. 신이 세상의 비극을 외면한다면, 자신이라도 책임져야 한다. 버키는 마샤의 곁을 떠나 홀로 외딴곳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자신을 법정에 세운 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지 않도록 스스로를 심판해 버린 것이다.

이 선하고 정의로운 청년의 인생은 어디에서 어긋났을까. 버키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의 고통을 너무 크게 책임지려 했기에, 즉 영웅적이었기에 파멸해 버렸다. 세계의 오점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결벽이 서서히 버키의 삶을 삼켜 복수의 여신 손에 넘겨준 것이다.

좋은 삶은 순수함보다 겸손함에 가깝다. 비극이 오는 걸 막지도 못하나 희망을 버리지도 않는 것이 인간이다. 고통 없는 삶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고통의 소멸은 살이 흙이 되었다는 뜻이다. 영웅심 탓에 버키는 이 평범한 진실을 잊고, 바이러스가 자신을 영영 패배시켰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인간은 심판당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수시로 다가오는 슬픔의 강을 건너고 비탄의 늪을 넘어서 가끔 기쁨의 꽃을 보려고 사는 것이다. 완전한 구원은 인간의 일이 아니다. 벌어진 일들과 힘껏 싸우되 성공과 실패를 겸허히 수용하면서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신을 심판하지 말라. 죽지도 말고 패하지도 말라. 좌절이 있더라도 네 탓은 아니다. 이것이 거장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다. 팬데믹 시대, 귀담아 둘 만하지 않은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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