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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박완규칼럼] 정치와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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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 편가르기로 사회갈등 확산

도덕을 정략적 수단으로 이용

정치는 선의 아닌 성과로 판가름

도덕으로 무능 은폐해선 안 돼

요즘 정치에 ‘선한 의도’ 같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정치인들이 매사를 선과 악으로 가르려 하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은 선의인데 상대방 주장은 악의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여야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곳곳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궤변이 난무한다.

벨기에 출신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개인의 출현, 교회와 국가의 분리, 종교적 관용의 원칙, 시민사회의 발전이라는 이 모든 요소 덕분에 우리는 도덕의 영역을 정치의 영역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공동선의 문제와 시민덕의 문제를 다시 한번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이것은 어떤 단일한 도덕적 선을 요청하는 일 없이 근대적 양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세계일보

박완규 논설실장


그런데 지금 정치권에서는 도덕 영역과 정치 영역의 경계를 흔들면서 단일한 도덕적 선을 내세운다. 도덕적 가치나 규범을 정치의 기반으로 삼는 차원을 넘어 도덕을 정략적 수단으로 이용한다. 여권과 그 지지자들은 스스로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여긴다. 신의나 의리를 중시한다. 그 결과 실용과 무관한 이념이 전면에 부각된다. 이제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일상적 풍경이 됐다. 내 편은 선이고 네 편은 악이다. 이념적 프레임으로 국민이 나누어진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칼럼집 ‘미네르바 성냥갑’에서 “억압받는 소수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에 반대하기 위해 미국에서 탄생한 ‘정치적 올바름’이 새로운 근본주의로 전환되려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모든 근본주의는 오직 단 한 가지의 진리만이 제시될 수 있을 뿐이라고 가정하고, 다른 모든 것은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한다”며 “텍스트의 ‘올바른’ 해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을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추방함으로써 분명 불관용적이 될 위험이 있다”고 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기준이 현실에 적용될 때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치 영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전적으로 옳은 정치 노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자기 시각에서 만사를 예단한다. 그러니 편가르기가 심화되고 경우에 따라 증오를 수반한 정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국민이 휘말려 든다. 오죽하면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기자간담회에서 “정치권은 경제 문제에 눈과 귀를 닫고 자기 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했겠는가.

언론학자 강준만은 ‘증오 상업주의’에서 증오를 정치의 원동력으로 삼는 현실을 비판한다. 증오 상업주의란 “명분·영향력·이익의 실현이나 확대를 위해 증오를 주요 콘텐츠로 삼는 정치적 의식과 행태”를 의미한다. “증오 상업주의에 함몰되는 순간 다른 상식적인 판단 능력과 더불어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상상력이 마비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가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을 잘 제시하느냐는 것이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진영 논리가 담긴 이념적 정책실험이 진행된다. 그런 정책이 제대로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에서는 이념과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례가 이어진다. 그러니 사사건건 사회적 논란으로 비화되고 진퇴양난의 처지로 빠져든다. 그렇다고 야당이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국민만 고통을 겪는다.

우리 공동체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날 조짐을 보이지 않는데 북한군의 우리 공무원 사살 사건 등으로 나라가 어수선하다. 정치권에서는 이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감정 분출만 요란하다. 모두가 진영 논리에 빠져 의미 없는 갈등만 온 사회에 퍼뜨리고 있다.

정치인들이 각성해야 한다. 이들이 가장 중요한 과제인 비전 제시를 외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정치는 선의가 아니라 성과로 판가름난다. 정치적 무능을 선의 같은 도덕적 용어로 감추려 해선 안 된다. 솔직해져야 정치적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국민이 정치를 부끄럽게 여기는 나라가 돼선 안 된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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