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권윤덕
아이와 텃밭에 나가 배운 것
어른은 수확에만 관심 있지만
아이는 벌레 보고도 즐거워해
‘이익=생존’에 갇힌 어른의 눈
그림책엔 위계 없는 시선 담겨
‘위안부’ 피해·광주항쟁·제주4·3
역사적 구체성 띤 그림책 주목
망친 선에서도 실마리를 찾아내 탐색선을 긋는 작가, 권윤덕. ‘위안부’ 피해 등 사회적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림책에 담아온 그가 말한다. “고발에 그쳐선 안 된다고 다짐해요. 보편적 가치를 담아내야 하고, 비극 속에서도 분명 존재했던 인간의 선한 의지에 주목해야 한다고요.” 사진=해란 작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림책은 0살부터 100살까지 읽는 책이라는 말이 있다. 그림책에 담긴 문학성과 미학성을 즐기는 성인 독자가 늘면서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표현이 이제 낯설지 않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작가주의 그림책 작가들이 있다. 한국 창작 그림책의 시초는 류재수의 <백두산 이야기>로 1988년에 출간되었다. 30여년의 짧은 역사, 학습지 중심의 척박한 시장 환경에도 한국 그림책 작가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한국은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수상 목록에 가장 자주 이름을 올리는 나라 중 하나다.
나는 그림책 작가들의 창조성의 근간에 돌파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자언어, 그림언어를 모두 지휘하기 위해, 30~60쪽 짧은 지면 안에 생의 가장 본질적인 지혜를 담아내기 위해, 또한 그것을 어느 생애주기에 있는 독자가 읽어도 유효하도록 빚어내기 위해 작가들은 여러 난관을 뚫고 나간다. 늘 넘어지고 뒹굴지만 다시 일어나 전진하는 그림책 속 작은 주인공들처럼 작가 스스로 세계를 믿고, 시도하고, 희망을 붙든다.
‘돌파하는 힘’이라는 화두로 한국 그림책 작가들을 인터뷰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작가가 권윤덕(61)이었다. 독학으로 산수화, 공필화(중국화 기법 중 하나로 붓으로 세밀하고 정교하게 그린 그림), 불화 등 동양화 기법을 연마해 그림책 작가가 된 그는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꽃할머니>, 제주4·3 사건을 다룬 <나무도장>,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씩스틴> 등 작품을 통해 시대적 아픔을 보듬어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고, 각자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여전히 반목과 충돌이 있는 사건을 자신의 그림책 안으로 가져와 어떻게든 희망을 말하고 화해를 이루려 애쓴다. 피 말리는 부담감과 방대한 자료 더미의 무게를 오롯이 지고 짧게는 3년, 길게는 13년을 매달린다. 사명감이나 정치적 올바름 같은 말로 그 시간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무엇이 이 일을 계속하게 하는 걸까? 망친 선에서도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고 꿋꿋하게 다시 탐색선을 긋는 작가, 권윤덕의 서울 평창동 작업실에서 창조적 에너지에 대한 대화를 시작했다.
• 작가 소개
권윤덕. 한국 창작 그림책 1세대 대표 작가. 25년째 화풍을 실험하는 노력파로 산수화, 불화 등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그림책으로 옮긴다. 1990년대 주거 문화를 백과사전식으로 풀어낸 <만희네 집>,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바탕으로 한 <꽃할머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씩스틴> 등이 대표작이다.
• 작품 목록
1998년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 길벗어린이
2002년 <만희네 글자벌레>, 길벗어린이
2003년 <시리동동 거미동동>, 창비
2008년 <일과 도구>, 길벗어린이
2010년 <꽃할머니>, 사계절
2013년 <피카이아>, 창비
2019년 <씩스틴>, 평화를품은책
독학으로 산수화, 공필화, 불화 등 동양화 기법을 연마한 권윤덕의 작품에선 동양화 특유의 다중 시점이 돋보인다. 인간과 동식물,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점을 유연하게 오가며 독자의 시야를 넓힌다. 사진=해란 작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95년, 서른여섯살에 거주하던 양옥집 풍경을 생활사 박물관처럼 풀어낸 <만희네 집>을 출간하셨지요. 민중미술운동을 하다 갑자기 그림책 분야로 뛰어드셨습니다.
“미술운동을 하면서 갤러리에서 일부 사람만 보는 그림을 그린다는 회의감이 있었습니다. 대중과 폭넓게 소통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데, 그림책이라는 매체를 발견하고 평생 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당시 경제적 이유로 시댁살이를 하고 있었어요. 남편이 시간강사였는데 교통비를 빼면 생활비가 안 되었고, 저희 부부가 결혼할 때 각자 생활비를 벌고 통장도 따로 관리하기로 약속했거든요. 한시라도 빨리 그림책 작가로 자리를 잡아야 했지요. 그래서 시부모님 병간호, 아들 만희 육아, 가사노동을 하면서 당시 살던 집 구석구석을 그렸어요. 매일이 투쟁이었어요. 선을 잘 그으려면 손이 떨리지 않아야 하는데, 대가족이 먹고 난 그릇을 설거지하면 손이 부들부들 떨려요. 식기세척기를 사달라고 주장해서 결국 들여놓았지요. 모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내 것을 확보하려고 끊임없이 싸웠어요. 그렇게 매일 부딪치는 일상 속에서 바라본 작고 구체적인 상황과 형상들이 결국 진실성 있는 생생한 그림을 만들어준 것 같아요. 저는 미술운동 할 때부터 구체성을 얻기 위한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만희네 집>을 그릴 땐 시부모님 안방에 있는 자개장 문양 그리는 것까지 재미있었지요.”
―<명상록>을 쓴 아우렐리우스가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길이 된다”고 했는데, 작가님도 장애물을 창작의 재료로 삼으셨네요.
“두고 봐라 하는 마음이 있어요. 비전공자(권 작가는 식품과학과 광고디자인을 전공했다)로서 그림 실력에 자괴감이 들 때는 ‘10년 뒤에 두고 봐라, 매일 꾸준히 노력하니까 분명 달라져 있을 거다’ 생각했고, 아들 만희를 키울 때도 ‘19년 뒤에 두고 봐라, 네가 성인이 되면 난 자유롭게 살 거다’ 생각했지요. 당장 코앞의 현실이 힘들 때는 먼 미래의 어떤 지점을 상상해요. 당시엔 첫 그림책을 어떻게든 완성해서 내 밥그릇을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었어요. ‘내가 이것을 정말로 원한다’는 실감을 가지게 되면 장애물, 난관, 제약 조건을 수긍하고 적응해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해볼 수는 없을지 탐색하게 돼요.”
―‘내가 이것을 정말로 원한다’는 실감을 좀처럼 못 느껴 고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전 산문집 <나의 작은 화판>을 내고 독자들과 워크숍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제 목표는 첫째, 참석자들이 첫 획을 긋는 용기를 내보게 하기. 둘째, 의도를 가지고 붓을 들어도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경험하게 하기. 모두가 자기만의 화판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내 마음속 풍경은 무슨 색일까?’라는 주제로 형태 없이 색만 칠하는 워크숍이었어요. 첫 획을 긋는 건 모두가 어려워하더라고요. 하얀 화판 끝에 그을 수도, 중간에 그을 수도, 힘 있게 그을 수도, 천천히 그을 수도 있으니까요. 많은 경우의 수 앞에서 자기 느낌대로 첫걸음을 떼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에요. 다만 한 획을 긋고 나면 다음은 조금 쉬워지지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붓의 성질, 종이의 성질, 색의 반응들 때문에 늘 예기치 않은 결과를 마주하게 돼요. 미지의 영역이 있기에 즐겁죠. 좋아하는 것을 향해 용기를 내는 일도 비슷해요. 어렵지만 작게라도 첫 획을 그어야 만남이 일어나요. 일단 부딪치고 나면 예측할 수 없는 경우의 수와 인연이 작동할 거예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림책 작가 권윤덕의 작업실. 사진=해란 작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작가님 책은 시점이 놀랍도록 유연해요. <만희네 집>, <일과 도구>는 동양화의 다중 시점을 적극 반영해서 공간을 구현했고, <피카이아>에서는 인간과 동식물이 서로 자리를 바꿔보는 장면이 나오고, <씩스틴>은 독자로 하여금 가해자의 자리와 피해자의 자리를 모두 오가게 해요.
“저는 자기확신을 경계해요. ‘위안부’ 피해자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꽃할머니>가 세상에 나오고, 한 초등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작가에게 편지 쓰기를 했나 봐요. 집으로 아이들의 편지가 날아오는데 엄청난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평화를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혹시 갈등을 조장하지는 않았나, 일본을 향한 분노만 일으키진 않았나, 여러 걱정이 들었어요. 충분한 자료 조사와 검증을 거쳤는데도 겁이 나더라고요. 그림책의 영향력을 깨달은 거예요. 그림책은 회화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어떤 감정을 만들어내요. 연대의 감정일 수도 있고, 분노의 감정일 수도 있어요. 작가의 시선이 편향되어 있으면 살아갈 날이 아주 많은 존재들에게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고요. 그래서 민감한 사회적 아픔을 다룬 그림책을 만들 때 고발에 그쳐선 안 된다고 다짐해요. 보편적 가치를 담아내야 하고, 비극 속에서도 분명 존재했던 인간의 선한 의지에 주목해야 한다고요.”
권윤덕 작가의 대표작 <꽃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
―<만희네 집>, <일과 도구>에는 조그맣게 그려진 물건과 몸짓이 담겨 있어요. 어른들은 그냥 보아 넘기지만, 어린이들은 모든 곳에 관심을 기울여요. 일상에서도 아이들은 늘 작은 디테일에 시선을 던지죠. 저는 이 지점에서 그림책 작가님들이 놀라워요. 성인이 되었지만 작은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잊지 않았으니까요.
“어른은 노동의 관점으로, 아이는 놀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봐요. 어릴 때 만희를 데리고 텃밭에 나가면 저는 토마토 수확에만 관심이 있는데, 만희는 토마토를 갉아먹는 벌레를 보고 즐거워해요. 노동의 관점에서 토마토는 소중하지만 벌레는 잡아야 하는 대상이죠. 하지만 아이에게는 토마토도 소중하고 벌레도 소중한 거예요. 여러 생명 그대로를 느끼면서 재미를 경험하는데 어른들은 그렇지 못하지요. 이미 위계를 배워서요. 이익을 취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체계 안에서 머리가 고착된 거예요. 그런데 그림책이 자꾸 건들죠. 자, 봐. 한 마리 벌레도 얼마나 소중한데. 잎을 뜯어먹는 모습도 예쁘잖아. 이것도 소중해, 라고요. 한때 우리가 가졌던 위계 없는 시선이 그림책에 담겨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림책을 보고 위안과 치유를 얻는 거예요. 그리워하는 가치가 그 안에 있으니까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권윤덕 작가의 화구들. 사진=해란 작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나의 작은 화판>에서 이렇게 쓰셨어요. “아이들은 자란다. 몸도 자라고 마음도 자라고 생각도 자란다. 그래서 아무리 심각한 문제도 아이들에게는 과정으로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과정으로만 존재하기.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몸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라고 번성하도록 진화해왔어요. 모든 생명이 그렇지요. 번성에 잘 적응하도록 변형도 해요. 누구나 그 힘이 있어요. 다만 발견하지 못하거나 믿지 않을 뿐이지요. 저는 <피카이아>를 만든 이후로 왜 살아야 하는가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어요. 인간만 혹은 나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태어난 게 아니란 걸 깨달았거든요.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살았던 작은 생물 피카이아가 진화해 척추동물이 생겨났고 인류도 나타난 건데요. 중요한 건 피카이아가 우월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란 거예요. 더 우월한 생물들도 많았는데 피카이아가 우연히 살아남았고, 이후로 무한히 펼쳐질 가능성을 품고 있었지요. 사람도 그래요. 살아 있음 자체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고, 태어나고 잘 살아내고 명을 다하면 다른 물질로 환원되는 것이 기본이지요. 성인이 되면 성장이 멈추고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생명활동 과정 안에 있어요. 상처가 나면 저절로 딱지가 앉고 치유되는 몸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고 한번 낯설게 바라보세요. 아무리 슬퍼도 때 되면 배고프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 푹 자고 일어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도요. 신기하고 대단하지 않나요? 나를 지키고 키워가는 힘은 이미 내 몸이 지니고 있어요. 그 믿음을 잃지 말았으면 해요.”
권윤덕 작가가 ‘몸’을 지키는 법. 사진=해란 작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사진=해란 작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인터뷰 중 권윤덕 작가는 유독 “멀리 보면”, 그리고 “경우의 수”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가해자이기만 한 사람과 피해자이기만 한 사람이 없듯 좌절만 하는 사람과 돌파만 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고 했다. 지금의 어려움은 잠시 찾아온 여러 가지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이니 너무 쉽게 결론 내지 말자고, 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자고.
인터뷰를 마칠 무렵, 마음에 밝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저 ‘나는 지금 과정 중에 있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을 뿐인데, 하얀 화판을 새로 받아든 것처럼 마음이 해사해졌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채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