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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조선 거상 임상옥의 술잔, 그 잔엔 비밀의 구멍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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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 展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1779~1855)이 늘 곁에 둔 물건이 있었다. 계영배(戒盈杯)라는 이름의 술잔이다. 보통 술잔과 달리 잔에 어느 정도 술이 채워지면 밑으로 모두 빠져나가게 만들어졌다. ‘과도한 음주를 경계하라’는 뜻과 함께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어, 임상옥은 늘 계영배를 보며 과욕을 경계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에서 이 술잔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19세기 백자 계영배를 컴퓨터 단층촬영(CT)한 결과, 잔 내부에 원통형 관(管)이 있었다. 정해진 양의 술을 따르면 대기압으로 인해 이 관을 타고 술이 스스로 빠져나가는 ‘사이펀(siphon)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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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양각 매화무늬 계영배'의 내부 이미지. 잔 내부에 관이 있어서 일정량의 술을 따르면 대기압으로 인해 잔 밑에 있는 그릇으로 술이 빠져나간다. 이것을 '사이펀'이라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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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나 고고학이 아니라 보존과학이 주인공인 전시다. 초창기만 해도 국내 보존과학은 초라한 수준이었다. 1976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처리실이 처음 생기고 첫 작업한 유물이 서울 삼양동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27호). 집 수리 중 곡괭이에 맞아 발견된 불상이라 옷자락 일부가 파손됐는데 마땅한 보존 기구가 없어 이쑤시개로 접착제를 붙였다. 그로부터 44년 지나 열리는 이 특별전은 보존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성과를 집약해 보여준다. 훼손된 유물을 붙이고 녹을 벗겨내는 수준에서 벗어나 적외선·자외선·엑스선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투과시켜 흔적만 남은 옛 글씨를 판독하고 유물의 내부 구조와 성분을 밝히는 과정을 흥미롭게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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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1세기 '금제 허리 띠고리'(국보 제89호).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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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89호 '금제 허리 띠고리'를 현미경으로 촬영한 모습. 용의 눈에서 붉은색 안료인 진사가 확인됐다.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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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1세기 ‘금제 허리띠 고리’(국보 제89호·길이 9.4㎝)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 중 가장 오래된 누금(미세한 금 알갱이를 녹여 붙이는 기법) 공예품. 표면에 일곱 마리 용이 꿈틀거리고 주변을 금실과 금 알갱이, 푸른 터키석으로 장식한 허리띠 버클이다. 육안으로도 화려한 이 유물을 현미경으로 촬영했더니 용의 몸통에 촘촘히 붙인 0.3~1.6㎜ 금 알갱이까지 또렷이 보였다. 성분 분석 결과, 용 일곱 마리의 눈에서 붉은 안료인 진사(辰砂)의 흔적도 나왔다. 무려 2000년 세월이 흘러 지금은 벗겨졌지만 황금색 용의 두 눈을 붉게 칠해 이글거리는 기상을 표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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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특별전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에 나온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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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특별전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에 나온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의 감마선 이미지.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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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쌍영총 고분 벽화를 적외선 촬영해 흐릿한 그림 속에서 소가 끄는 수레 2대와 갑옷으로 무장한 개마무사, 남녀 30여 명을 찾아냈다.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 인물형 토기’(국보 제91호)가 원래 주전자라는 건 알려진 얘기지만, 그 속에 담을 수 있는 액체 양이 240㏄라는 건 새로 밝혀냈다. 가시광선과 적외선으로 촬영한 경복궁 교태전 부벽화도 처음 나왔다. 먼저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동영상을 훑어보고 전시장에 가시길.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 검진하는 날’ ‘조선시대 연적의 내부 구조와 물길’ 등 짤막한 영상이 흥미진진하다. 11월 1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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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투각 구름 용무늬 연적.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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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투각 구름 용무늬 연적 내부.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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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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