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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사설] 택배 과로사 대책 못 세우면 ‘약자 보호’ 말할 자격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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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고용노동부가 어제부터 택배업체들에 대한 안전보건조치 긴급점검에 들어갔다. 8일 숨진 택배기사가 근무했던 CJ대한통운 등의 주요 서브터미널 40곳과 대리점 400곳을 대상으로 기준을 초과하는 과로 업무와 산재보험 신고 여부 등을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한 조치이나 전형적인 늑장 행정이다. 이번 긴급점검이 택배업계의 산업안전보건을 철저히 감독·점검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후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노동환경 개선을 담당하는 고용부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된다.

최근 택배기사 등 특수고용직(특고) 노동자에 대한 산업재해 ‘적용 제외’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법 개정에 나선 국회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발의한 것과 같은 내용의 개정안이 지난 18대 국회 때부터 잇달아 제출됐지만 그때마다 재계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현행법상 특고 14개 직종은 산재보험 당연 적용 대상이지만, 본인이 신청하면 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 노동현장에선 사업주가 보험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적용 제외 신청을 강요하는 일이 적지 않다. 현재 특고 종사자의 산재보험 가입률이 20%를 밑도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정치권이 이번에 법의 맹점을 보완하겠다지만 질병·육아 등 예외적 사유를 만들 경우 또 다른 악용의 소지가 생길 개연성이 있다.

최근 5년 동안 산업재해 등으로 숨진 택배기사는 21명에 달한다. 이 중 11명이 올해 사망했고 이달에만 4명이 눈을 감았다. 그제도 50대 택배기사가 업계의 갑질과 생활고를 호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택배기사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12시간이 넘는다고 한다. 12일 숨진 30대 택배기사 김모씨는 새벽 4시에 동료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집에 가면 5시인데 밥 먹고 씻고 바로 터미널 가면 한숨도 못 자고 또 물건 정리(분류작업)를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택배기사들의 사망 원인은 대부분 과로사이지만 근본 원인은 이들을 사각지대에 방치한 무능 행정이다.

노동·시민단체들은 어제 발표한 공동선언문에서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사는 구조적 타살”이라고 했다. ‘경제약자 보호’를 내세우는 문재인정부에서 택배기사들이 연이어 죽음을 맞는 현상은 예삿일이 아니다. 정부가 실태 조사에 나선 만큼 이번에는 근본 대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사후약방문이지만 안타까운 사고의 재발을 막자면 제대로 약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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