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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이건희 별세]"마누라·자식 빼곤 다 바꿔" 지금의 삼성 만든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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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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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 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1997년 쓴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선친인 이병철 회장 타계 후 13일만인 87년 12월 1일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이 내부에서 본 당시 한국 최고기업 삼성은 ‘위기’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가 오랜 숙고 끝에 내놓은 것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이다.



미국 매장 구석에 쳐박힌 섬성TV보고 충격



이 회장은 회장 취임 5년째던 93년 2월 임원들과 해외시장을 순방했다. 하지만 첫 방문지였던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베스트바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삼성TV를 보고 충격을 받고 순방을 중단한다. 그때 마침 일명 '후쿠다 보고서'를 접하게 된다. 디자인 전문가로 89년 삼성이 영입한 후쿠다 다미오가 작성한 56쪽자리 보고서에는 '기본이 안돼 있는 삼성'에 대한 냉혹한 평가가 담겨 있었다. 도쿄로 날아가 후쿠다를 만난 이 회장은 일본 측 고문들만 따로 불러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밤샘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이 회장은 또 사내 방송국이 제작한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격노한다. 삼성전자 세탁기 생산라인의 불량품 제조 현장에서 몰래 촬영한 영상에는 세탁기 뚜껑이 몸체와 맞지 않자 한 직원이 아무렇지 않게 칼로 뚜껑 테두리를 잘라내 조립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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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계열사 사장단회의에서 21세기에 대비해 기술개발과 인재양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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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해도 안되면 영원히 안되는 거다"



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의 켐핀스키 호텔. 이 회장은 본사와 각국 법인장을 불러 모은 비상경영회의에서 양 경영에서 질 경영으로의 근본적인 혁신을 주문한다.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봐라. 농담이 아니다. 그래야 비서실이 변하고 계열사 사장과 임원이 바뀐다. 과장급 이상 3000명이 바뀌어야 그룹이 바뀐다. 나는 앞으로 5년간 이런 식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걸겠다. 그래도 바뀌지 않으면 그만두겠다. 10년을 해도 안 된다면 영원히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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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미국의 격주간 종합경제지 포춘과 인터뷰하는 이건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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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삼성의 변화로 이어졌다. “품질을 위해서라면 생산·서비스 라인을 멈추라”는 지시로 시작된 ‘라인 스톱제’, “문제가 생기면 5번 정도는 이유를 따져보라”는 이건희식 ‘5WHY’ 사고론, ‘디자인과 경영은 별개가 아니다’는 디자인 경영론, 학력·성별제한을 없앤 ‘열린 채용’ 제도 같은 혁신이 계속됐다. 이 회장은 또 200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제2 디자인 혁명'을 선포했다. 이 회장은 “삼성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라고 질타하며 “제품이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다. 이 짧은 순간에 고객을 사로잡지 못하면 경쟁기업과의 전쟁에서 절대 승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이건희식 경영’은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그의 경영 이면엔 그림자 역시 길다. 대표적인 게 자동차 사업이다. 이 회장은 1995년 숙원사업이었던 자동차 분야에 진출했지만, 외환위기 등을 겪으며 실패했고, 4조3000억원의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99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삼성이 창업 초기부터 고수한 무노조·비노조 경영 원칙 역시 시민·노동계의 끊임없는 반발을 샀다. '은둔의 경영자'라는 별칭 속에 제왕적 경영과 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 등을 앞세운 경영도 논란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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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프랑크푸르트 간부교육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연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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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오랜 정경유착 관행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 회장은 95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일갈했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국민과 정부, 기업이 삼위일체가 돼야지만 정부와 정치권이 규제폭탄만 쏟아낸다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이 회장 역시 96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불법 정치자금을 모은 '차떼기 사건'에 각각 연루됐다. 2008년에는 양도소득세 456억원을 포탈한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2012년엔 맏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상속 분쟁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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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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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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