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신경영 선언하는 이건희 회장 |
(서울=연합뉴스) 서미숙 기자 = "지난 반세기 삼성을 일으키고 키워오셨던 창업주를 졸지에 여의고…"
이건희 회장은 1987년 12월 1일 제2대 삼성그룹 회장 취임식에서 삼성에 가장 먼저 입사한 최관식 삼성중공업 사장한테서 그룹의 사기(社旗)를 건네받아 흔든다.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1991년 둘째형 창희 씨가 사망하고 이듬해 삼성가(家)의 분할은 거의 마무리됐다. 삼성가 가족회의에서 제일제당과 안국화재는 큰형 맹희 씨 집안으로, 제일합섬은 둘째형 집안인 새한미디어로 정리가 됐다. 동방생명(삼성생명)은 승계자 이 회장의 몫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이후 그룹의 변신을 꾀하던 그는 그러나 1993년까지는 이렇다 할 조처를 내놓지 않는다. 1991년에 나온 해외지역전문가 파견제도. 이른바 독신자파견제로 불리던 이 제도 정도가 회장 이건희의 작품이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에도 강진구 삼성전자 회장을 대리 참석시키고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세인들은 이건희 회장을 '은둔의 황제'라고 불렀다. 하지만 '업(業)의 특성'을 꿰뚫어본 이 회장의 직관은 대단했다. 1990년대 초 신세계 사장에게 '백화점 산업은 무엇이냐'고 물어본 일화가 있다.
대답을 머뭇거리자 이 회장은 "백화점은 부동산업"이라고 정의한다. 유통업이 아니란 뜻이다. 이어 호텔은 서비스업이 아니라 장치산업, 반도체는 시간산업, 시계는 패션산업, 가전은 조립양산업이란 정의가 줄줄 나왔다.
회장 취임 5년차인 1993년. 삼성 역사에 남을 중요한 해가 밝았다.
그해 2월. 삼성이 8㎜ VTR을 막 개발해 시장에 내놓던 시기다. 이 회장은 임원들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가전매장을 찾았다. GE, 필립스, 소니, 도시바 등 선진국 전자회사들의 휘황찬란한 제품 진열장 한 귀퉁이에 삼성 제품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LA 센추리프라자 호텔 회의장. 이 회장은 78가지 전자제품을 갖다놓고 당장 분해하라고 했다. 삼성 제품은 싸구려로 취급당했기 때문이다. 회의장에는 내내 이 회장의 호통과 불호령이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그해 6월 도쿄 오쿠라 호텔에선 이 회장이 일본 기업 교세라에서 직접 스카우트한 후쿠다 다미오 삼성전자 디자인고문이 마주앉았다. 그는 삼성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파헤쳤다.
일본 기업은 세계 1위 제품을 놓고도 연구소에서 밤을 지새우는데 삼성은 국내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일찍 퇴근하더라, 삼성 직원은 텃세가 심해 외국인 고문 얘기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듣지 않으려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회장은 후쿠다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세탁기 사건이 터졌다. 삼성사내방송 SBC의 몰래카메라 영상물에는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 부품이 들어맞지 않자 직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칼로 2㎜를 깎아내고 조립하는 장면이 나왔다. 심지어 교대자를 바꿔가며 이런 식으로 제품을 대충 끼워 맞추는 장면이 카메라에 적나라하게 잡혔다.
1993년 '신경영' 발표 당시 이건희 회장 모습 [삼성전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이 회장은 득달같이 이학수 비서실 차장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녹음하시오. 이게 그토록 강조했던 질 경영의 결과란 말이요. 당장 사장과 임원들 모두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키세요."
당시 윤종용, 김순택, 현명관 등 삼성의 스타급 CEO와 고위 임원들이 부랴부랴 항공권을 구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캠핀스키 호텔. 한적한 시 외곽의 소규모 호텔이지만 초호화 등급인 이 호텔에서 삼성의 역사를 바꾸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나온다.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압축되는 신경영 선언을 했다.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조립하는 것을 보고 격노했던 그가 삼성의 제2 창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 회장은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변화의 방향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에세이에 썼다.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결심을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담아낸 것이다. 삼성의 신경영은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이 회장은 테이프를 갉아먹는 VTR, 시청 도중에 퓨즈가 나가는 TV를 쳐다보면서 탄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삼성전자는 3만명이 만든 물건을 6천명이 고치러 다닌다. 암으로 치면 2기"라는 말도 했다.
삼성 서초 사옥 [연합뉴스 자료사진] |
이 회장은 "전자산업의 경우 불량률이 3%에 달하면 그 회사는 망한다. '불량은 암이다. 악의 근원이다'라고 되뇌면서 일하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불량은 범죄'라는 철학도 그래서 나왔다. 이후 이 회장은 삼성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대수술에 들어갔다.
국내 기업들의 출퇴근 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이른바 '7·4제'도 그다음에 나왔다.
삼성은 불량품이 발생하면 그 즉시 라인을 멈추는 라인스톱제도를 도입해 불량률 제로에 도전했다. 신경영이 삼성의 체질을 뿌리부터 바꿔나갔고 초일류를 향한 새로운 걸음걸이가 시작됐다.
이 회장은 에세이에서 "한국 기업의 풍토는 세계 삼류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경각심을 느끼기보다는 국내 정상이라는 우물 속 평온함을 즐기고 안도감에 젖기를 원한다"고 지적했다. 어렵사리 모셔온 기술고문들의 노하우를 겸허히 배우려 하기보다는 '배워서는 안되는' 온갖 이유를 찾아내려는 오그라진 형태를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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