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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이건희 별세] 위기를 기회로 바꾼 '역발상'…반도체 신화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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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반도체 스택 방식 결정

통화·종료 버튼 위로 올린 '이건희 폰'

헤럴드경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위기 때마다 직접 역발상의 제안을 해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사진은 2002년 삼성 사장단 워크숍을 주재하는 이건희 회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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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원호연 기자]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위기마다 빠르고 과감한 판단과 장기적 안목으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1983년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혀 없던 삼성은 이 회장의 진두지휘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결단은 일본을 제치고 반도체 시장에서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중요한 결정이 계기가 됐다.

1987년 4메가 D램 개발 경쟁이 붙었을 때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개발 방식을 스택(stack)으로 할지, 트렌치(trench) 방식으로 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스택은 회로를 고층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고, 트렌치는 밑으로 파 내려가는 방식이다. 개발진 사이에서도 어떤 방식을 선택해야 할지 의견이 양 갈래로 나뉘었다. 당시 회의에서 전문경영인들이 처음 시도하는 기술인 스택 공법을 도입하는데 주저했다.

그러자 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지하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 이 회장의 결정은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당시 트렌치 방식을 택했던 경쟁업체를 제치고 메모리 반도체 패권을 쥐었다. 1992년 세계 최초 64메가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서 메모리 강국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 1위에 오른다.

이 회장은 이후 각종 제품 개발에서도 직접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모토로라가 처음 휴대전화를 내놓은 이후 그때까지 휴대전화의 통화(SEND)와 종료(END) 버튼은 일괄적으로 숫자키 아래에 있었다.

이 회장은 "가장 많이 쓰는 키가 통화와 종료 키인데, 이게 아래쪽에 있으면 한 손으로 전화를 받거나 끊기가 불편하다. 두 키를 위로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통화와 종료 키가 위로 올라간 삼성 휴대전화가 출시됐고, 이른바 '이건희 폰'은 소비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1993년 6월 초,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이건희 회장 앞으로 삼성 사내방송팀이 제작한 30분짜리 비디오테이프 하나가 전달된다.

당시 비디오테이프에는 세탁기 생산라인 직원들이 세탁기 뚜껑 규격이 맞지 않자 칼로 뚜껑을 깎아내 본체에 붙이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뚜껑 부분을 다시 설계하고 생산해야 했지만, 직원들이 별생각 없이 플라스틱을 깎고 불량품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회장의 '소집령'이 떨어진 후 일주일 뒤 삼성전자 사장단과 임원, 해외 주재원 등 200여 명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였다.

그해 6월 7일, 이 회장은 양이 아닌 질(質) 경영을 위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꿔라"는 말로 질책하며 '신경영' 선언,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게 된다.

이제까지 지속했던 양 위주 경영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질을 중심으로 양이 조화를 이루는 선순환의 경영구조를 실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는 진행성 암,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삼성건설은 영양실조에 당뇨병, 삼성종합화학은 애초부터 설립해서는 안 되는 회사였다"고 진단했다.

이 회장의 주요 경영철학인 '메기론'도 이때 나왔다. 미꾸라지를 키우는 논에 천적인 메기를 넣으면 미꾸라지들이 생존을 위해 더 많이 먹고 더 열심히 움직여 힘도 세지고 날렵해진다는 것이다. 외부 인재를 투입해 내부 경쟁을 유발하겠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신경영 선언 이후에도 1994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는 제품 출시를 무리하게 서두르다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불량은 암"이라며 질타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불량품이 나오자 소비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후 삼성은 신문에 대대적인 광고를 실은 뒤 불량 제품을 교환해줬고, 1995년 3월 9일 특단의 조처를 한다.

시중에 판매된 무선전화 15만 대를 전량 회수해 삼성전자 구미공장 운동장에 쌓았고, 임직원 2천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머를 든 몇 명의 직원들이 전화기 더미를 내리쳐 산산조각을 낸 뒤 불구덩이에 넣은 것이다.

당시 잿더미로 변한 무선전화는 150억 원어치의 분량이었다. 엄청난 충격요법이었던 이 사건은 '애니콜'과 '갤럭시'로 이어지는 삼성전자 휴대전화 신화의 밑거름이 된 일화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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