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권과 '애증의 세월'…이명박과 '다스'로 얽혀
1978년부터 후계자 수업을 거쳐 19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쓰러질 때까지 전두환 전 대통령부터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6명의 대통령을 경험했다.
정권과 표면적으로 증폭된 갈등이나 인연은 크게 뚜렷하지는 않은 편이다.
다만 대통령들은 경제인들과 함께하는 각종 행사 때마다 재계의 대표 격인 이 회장을 옆자리에 앉히며 각별하게 관리하고자 했지만, 시대에 따라서 관계가 틀어지기도 했다.
그는 1996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노 전 대통령에게 100억원을 전달한 혐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당시 "(박정희) 3공화국 때부터 피해를 제일 많이 본 것이 삼성"이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이 회장은 "3공 때는 청와대에서 전화하면 돈 달라는 거고 5공(전두환) 때는 영수증을 줬다. 6공(노태우) 때는 '이심전심'으로 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건희 회장 |
문민정부 당시 '신경영'을 기치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며 전면적인 그룹 체질 개선을 추진하던 이 회장은 공식 석상에서 돌연 '폭탄 발언'을 했다.
1995년 중국 베이징 방문 때 현지 특파원단 간담회에서 삼성자동차 사업과 관련한 기업 규제를 비판하며 "우리나라의 정치력은 4류, 행정력은 3류, 기업능력은 2류"라고 일갈했다가, 정권 실세들과 관료들의 불쾌감을 산 것이다.
며칠 뒤 YS는 청와대 간담회에서 해당 발언을 놓고 "이건희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이듬해 터진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받는 등 YS 임기말 곤욕을 치러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건희 회장 |
김대중(DJ) 정권과도 미묘한 관계를 유지했다.
외환위기 속에서 출범한 DJ 정권의 재계 구조조정, 이른바 '빅딜' 작업은 이 회장의 숙원이었던 세계일류 자동차메이커의 꿈을 무산시켰다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내며 구조조정 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장성민 전 의원은 연합뉴스 통화에서 "당시 이 회장이 삼성자동차 사업을 지키려는 의지가 컸으나, 업종 전문화를 이뤄야 한다는 김 전 대통령 뜻에 따라 매각을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건희 회장 |
노무현 정권에서는 출범 초 반(反)기업적 정책이 추진될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취임 2개월만인 2003년 4월 노 전 대통령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던 이 회장을 만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곳곳에 친(親)삼성 인사를 중용하는 등 밀접한 관계가 정권 내내 이어졌다.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
기업인 출신인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2007년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이 회장 등 재계 총수들을 만난 자리에서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friendly·친기업적) 정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이 전 대통령은 비자금 사건으로 특검에 기소된 이 회장을 2009년 12월 단독 특별사면했는데, 평창올림픽 유치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 회장은 2011년 MB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흡족하다기보다는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평가한 적도 있다.
하지만 특사 이면에 이 전 대통령 측 '다스 소송' 비용을 삼성이 대납한 사실이 드러났고, 2018년 이 전 대통령 구속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3년 5월 방미 때 이 회장과 동행했으나 이 회장이 2014년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교류가 이어지지 못했다.
d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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