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오른쪽)과 박래현 부부의 생전 모습. |
빨간 석류가 무르익은 나무에 있는 다람쥐 2마리가 정겹다. 마주보지 않지만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모습이 인생의 동반자인 부부 같다.
1969년 운보 김기창(1913~2001)이 아내 우향 박래현(1920~1976)에게 선물한 그림 '석류와 다람쥐'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우향이 생전에 애지중지하던 작품으로 서울 압구정동 청작화랑 부부전 '우향 박래현 판화전 WITH 운보 김기창'에 걸렸다.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는 운보의 아들인 김완(71) 소장품으로 손성례 청작화랑 대표와 오랜 인연으로 이번 부부전이 성사됐다. 청작화랑은 운보의 생전인 1988년 7월 '부부전', 2018년 9월 '우향 박래현 판화전' 등을 열어 두 한국화 거장의 작품 세계를 조명해왔다.
박래현의 1970~1973년 판화 `현상`(왼쪽)과 김기창이 그려서 아내에게 선물한 채색화 `석류와 다람쥐`(39.5×32㎝). [사진 제공 = 청작화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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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대표는 "운보와 우향 부부는 신화적인 사랑을 해서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했으며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렸다"며 "한국화의 현대화에 선구적 역할을 한 두 분의 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운보와 우향 부부는 생전에 1947년부터 1971년까지 총 12회 부부전을 열었다. 사후에 열리는 이번 부부전에는 결혼한 지 22년이 지나도 아내를 향한 애틋한 붓질을 담은 운보의 1969년 채색화 '석류와 다람쥐'를 비롯해 운보의 산수화와 도자기 8점, 박래현의 판화 작품 23점 등 총 31점이 펼쳐졌다.
운보 우향 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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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결혼해 1남 3녀를 둔 운보와 우향은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 군산 대지주의 장녀로 태어나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학한 신여성 우향과 유년시절 열병으로 청각장애를 얻은 화가 운보는 첫 눈에 반했다고 한다. 우향이 나이 지긋한 화단 선배인 줄 알고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운보 집에 인사를 하러 간 날에 공교롭게도 그는 없었다. 된장찌개와 보리밥으로 차린 저녁상을 얻어 먹고 하염없이 기다린 후에야 생각보다 젊고 훤칠한 운보가 나타났다. 운보 역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우향을 보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구나'라고 생각했다. '결혼 후에도 화가로 살게 해 준다'는 운보의 약속을 믿은 우향은 민속박물관에서 조촐한 혼인식을 올렸다.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사위를 반대한 어머니는 불참한 채로.
김기창 박래현 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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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향은 남편 그림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신혼방에 가림막을 치고 작업을 계속했다. 운보도 틈날 때마다 콩나물을 다듬어주는 등 가사와 육아에 힘을 보탰다. 두 사람이 붓질을 합친 합작도도 여럿 제작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우향 탄생 100주년 기념전 '박래현, 삼중통역자'에 1956년 두 사람이 그린 4폭 병풍 채색화 '봄C'가 걸려 있다. 우향이 먼저 등나무를 그린 뒤 운보가 참새를 그리고 글을 썼다. 오래된 등나무 둥치를 표현한 우향의 힘찬 붓질은 기량이 무르익은 화가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박래현 1970_1973년 동판화 새벽 |
아내의 예술 열정을 존중한 운보는 뒤늦은 유학에도 동의했다. 47세에야 미국으로 간 우향은 뉴욕 프랫 그래픽아트센터에 들어갔고, 밥 블랙번 판화 공방에서 본격적으로 판화 작업을 했다. 이번 전시장에는 오늘날 미디어 아트를 연상시키는 1972년 동판화 '빛의 향연' 연작, 부채 형태로 색채 배합을 실험한 1970~1973년작 '현상', 고대 문양을 떠올리게 하는 1970~1973년작 동판화 '새벽' 등이 걸려 있다. 우향은 평생 판화 100여 점을 제작했으며 현재 점당 200만~500만원에 팔린다.
박래현 1970_1973년 동판화 희열의 상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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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 떨어져 있던 아내가 간암 말기로 세상을 떠나자 운보는 '바보 산수'를 그리며 슬픔을 견뎠다. '내가 바보가 아닌가'라고 자책하면서 소나무 잎을 동글동글하게 표현한 비현실적인 산수화다. 구상에서 반구상으로 가는 과도기 작품인 1992년 '바보산수' 1991년 '문자도' 1977년 '청록산수' 청화 백자 작품 등이 이번 부부전을 장식한다. 전시는 오는 12월 5일까지.
박래현 1972년 동판화 빛의 향연2 |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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