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세계포럼] 서두른다고 될 일 아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바이든시대 외교환경 변했는데

정부는 비현실적 대북전략 고수

2001년 ‘외교참사’ 반면교사 삼아

美 정권교체기 차분히 지켜봐야

문재인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17년 6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전직 미국 고위 외교당국자가 대북 압박외교와 관련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상황이 어렵다”며 “한국의 정부 교체가 부분적 원인”이라고 했다. “전임 정부에서는 일관된 대북 압박 캠페인을 벌이는 데 한·미 정부 간에 한 치의 틈도 없었다”며 “(한국) 새 정부는 다른 (대북)접근법을 갖고 있어 미국 외교를 더 어렵게 한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을 한 주 앞두고 한·미 간 대북공조에 우려를 표시한 것이다. 그는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 대북정책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바로 토니 블링컨 전 국무부 부장관이다. 내년 1월 출범하는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북핵 문제를 총괄하는 국무장관으로 돌아온다.

세계일보

원재연 논설위원


블링컨은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대북 문제에선 확고한 원칙주의자다. 2015∼2017년 부장관 재직 시절 지금의 강력한 대북제재 틀을 잡은 게 블링컨이다. 북한이 4·5차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등 고강도 도발을 거듭하자 블링컨은 국제사회의 대북압박 구도를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한·미 공조와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응을 강조하면서 박근혜정부와 협력해 촘촘한 대북 제재망을 짰다. 북한과의 대화는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 등) 도발과 인권 침해 행위를 중단하고, 비핵화 의무를 달성한다면”(2016년 브루킹스연구소 연설)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미국 정권 교체기는 세계 각국에도 민감한 시기다. 국제질서를 좌우할 차기 행정부 외교안보정책 윤곽이 드러난다.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번처럼 성격이 판이한 정권이 배턴 터치를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바이든은 트럼프와 달리 동맹과 다자주의를 중시한다. 트럼프식 톱다운이 아닌 상향식 의사 결정을 선호한다.

2001년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로의 정권 교체기에 한·미 관계가 휘청거린 적이 있다. 김대중(DJ) 대통령은 부시 취임 40여일 만인 그해 3월 열린 정상회담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계승하라고 설득했다. 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사달이 났다. 부시가 DJ를 ‘디스 맨(This man)’으로 부르면서 “북한 지도자에게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불신을 표시한 것이다. 부시의 외교 결례는 문제지만 김대중정부가 네오콘 중심의 부시 행정부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정상회담을 서두른 탓이 크다.

한국이 얼마나 조급했는지는 잭 프리처드 전 국무부 대북특사의 저서 ‘실패한 외교’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 부시가 취임한 닷새 후인 2001년 1월 25일 통화에서 DJ는 대북 포용 필요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시는 손으로 수화기를 가리며 프리처드에게 말했다. “이 친구 누구야?(Who is this guy?)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

한국 외교가 19년 전 실수를 되풀이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인다. 정부는 내년 도쿄올림픽 때 남북 및 미·일 정상 회동 이벤트를 추진 중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동력을 이어가려는 구상이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달 연평도 포격 사건 10주년 날 재계 인사들을 불러모아 남북경협을 강조했다. 대북제재가 엄존한 상황에서 비현실적이다. 북한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맹자 ‘공손추 편’에 알묘조장(揠苗助長)이란 고사성어가 나온다. 곡식이 빨리 자라게 하려고 싹을 잡아당겼다가 모두 말라죽게 한 어리석은 농부 얘기다. 서두르면 외려 일을 망치게 된다는 뜻이다. “서둘러 가려다 오히려 이르지 못한다(欲速則不達)”는 공자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바이든 행정부 외교안보팀이 대북정책을 검토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정부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게 현명하다. 동맹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 문제를 한국과 긴밀하게 상의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하자는 게 아니다. 북핵 문제를 풀려면 미국과 손발을 맞출 수밖에 없는 만큼 우리만 앞서나가지 말자는 얘기다. 정부가 조급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2001년의 외교 참사가 옛일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원재연 논설위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