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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삶과문화] 가면을 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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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이라는 속성을 가진 가면

쓰고 있는 동안엔 그 인물이 돼

본성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제껏 몰랐던 내 모습 볼 수도

잔 윌리스(Jeanne Willis)가 쓴 유아용 그림책 ‘올챙이의 약속’에서는 연못가 수면으로 올라온 올챙이와 물 위로 늘어진 버드나무 잎에 붙은 나방 애벌레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 채 둘은 서로를 흑진주와 무지개라 부르며 영원토록 변하지 말자고 약속한다. 시간이 흘러 올챙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뒷발과 앞발이 솟아나고 꼬리도 떨어져 나갔다. 나방 애벌레는 그가 약속을 어긴 것에 실망하여 잠적해버린다. 그런데 잠시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유난히 가벼운 것이었다. 날개가 돋아난 나방 애벌레는 그제야 올챙이를 용서하고 서둘러 그를 만나러 연못가에 날아갔다.

연못가에는 처음 보는 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있다. 나비는 개구리에게 다가가서 흑진주를 보았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개구리가 긴 혀를 날름거려 나비를 꿀꺽 삼켜버렸다. 그 자리에 혼자 남은 개구리는 나방 애벌레가 왜 오지 않는지 궁금해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당연히 둘이 화해하는 해피엔드의 장면을 기대했던 나는 이 처절하고 모호한 결말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물론 아이들은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어른 세계에 있는 내게 그 결말은 동물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은 누구라도 거스를 수 없다는 뜻으로 읽혔다. 정말로 본성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세계일보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이솝우화’를 비롯하여 그림책과 동화, 그리고 만화에는 의인화된 동물이 종종 등장한다. 어릴 적 그런 책들을 접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인간이 아니고 알고 보면 각기 다른 동물일 거라는 상상을 했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틈틈이 ‘나는 어떤 동물을 닮았을까’, ‘저 사람은 초식동물 유형일까, 육식동물 유형일까’하고 가끔 혼자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이타가키 파루의 만화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비스타즈’를 봤는데, 내 상상과 맞닿은 점이 있어 반가웠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공존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명문 학교에 다니는 주인공들은 모두 청소년 교복을 입은 동물들이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주인공은 늑대인데 타고난 육식의 본성을 꾹 참아 억누르면서 초식동물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힘겨운 영웅의 길을 간다. 뿔이 우아한 순록이 늑대의 행동과 매 순간 비교될 만한 쟁쟁한 조연급 주인공이다. 학생회장인 순록은 초식동물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극도로 밀어붙이며 자아실현을 꿈꾸는 야심가이다.

이 애니메이션에 집중하다 보면, 동물이 사람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사람이 동물 가면을 쓰고 연기한다는 착각이 든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는 배우들이 가면을 썼다고 한다. 처음엔 청동으로 만든 가면을 썼지만, 너무 무거워서 연기하기 불편했기 때문에, 점차 나무나 종이 등 가벼운 재료로 가면을 만들어 썼고, 나중에는 분장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가면에는 변신의 속성이 있다.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그 가면의 인물이 된다는 뜻이다. 축제나 무도회 때 가면을 쓰는 이유 중에는 지금의 나를 벗어던지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보라는 의미도 있다. 가면을 쓴 후에 본능에 더 솔직해질 수도 있고, 오히려 본능을 통제하는 쪽으로 바뀌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낯선 가면을 써본 덕분에 내가 알지 못하던 진짜 내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는 연극배우가 얼굴에 쓰는 ‘가면’에서 유래했다. 연극배우의 가면을 일컫던 말이 점차 그 인간의 인격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확장된 것이다. 어쩌면 사람은 제각각 다른 동물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하지 않고 저마다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분투하며 살아간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마스크를 쓴 존재였다는 뜻이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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