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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장석주의인문정원] 제주도서 과거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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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변곡점마다 계기가 된 장소

현재는 과거의 중첩이 빚어낸 것

11월의 마지막 주말 제주도의 한 인문학 서점에 강연을 다녀왔다. 김포공항을 뜬 여객기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제주공항에 착륙한다. 여객기가 내륙을 가로질러 상공을 날아가는 동안 불현듯 제주도와 이어진 나의 ‘과거’를 소환한다. 기억의 갈피에 묻은 제주도라니, 한 줄기 감회가 없을 수 없다.

1980년 여름, 출판사 직원으로 밥벌이를 할 때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주한 한 작가의 소설을 받으러 입도(入島)했다. 2주 동안 있었지만 작가에게 원고를 받지 못한 채 빈손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한창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작가에게 거액을 쥐어주고 전속계약을 한 것은 내 제안이었다. 허탈한 심경으로 제주도를 떠났는데, 내 무능에 책임을 지기로 했다. 서울에 올라와서 퇴직과 출판사 창업 의사를 밝힌 뒤 사표를 냈다. 출판사 사장이 ‘이 어려운 때에 창업은 어리석은 결정이다’라고 극구 말렸지만 내 결심은 굳었다. 퇴직금을 받아 손바닥만 한 사무실을 얻고 출판사 창업을 했다. 그 출판사를 13년 동안 경영하며 여러 책을 기획하고 펴냈다.

세계일보

장석주 시인


한 필화 사건으로 1992년 10월 29일 전격 구속되어 구치소에 있다가 그해 12월 30일에 풀려났다. 막막했다. 이듬해 1월 3일인가, 세면도구만을 챙겨 다시 제주도에 내려왔다. 서귀포에 사는 지인 K의 집에서 머물면서 마음 정리를 했다. 일제강점기 때 전분공장을 하다가 해방 뒤엔 권투도장으로 쓰던 고모의 집을 K가 관리하는 중이었다. K는 별채에 딸린 방 한 칸을 무상으로 내어주었다. 마당 끝자락은 벼랑이고, 벼랑 너머는 망망대해였다. 한밤중 오줌 누러 나왔다가 먼 바다의 배들이 밤샘 조업을 하느라 불을 밝힌 채 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곤 했다. K는 제법 알려진 노래도 두어 곡이 있었지만 무명이나 다를 바 없는 작곡가였다. 그 무렵엔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일없이 빈둥거리며 지냈다. 밤엔 기타를 연주하며 제가 만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변방에 눌러앉은 자의 평온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의 작곡 노트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아름다운 수백 곡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심심한 날엔 운동화 뒤꿈치를 반쯤 구겨 신고 서귀포에 하나밖에 없는 상영관에 나가 혼자 영화를 보러 나갔다. 그때 본 영화 중 어린 배우 김혜수가 나오는 이명세 감독의 동화처럼 아름다운 영화 ‘첫사랑’이 기억에 또렷하다. 한 달 만에 마음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출판사를 접었다. 출판업에서 손을 떼고 전업작가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제주도는 출판사의 창업과 폐업을 굳힌 실존적 결단의 장소가 되었으니 내 인생의 변곡점마다 제주도가 오롯했던 거다.

제주도를 떠난 뒤 K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살던 때 K는 술에 취한 채 전화를 걸어 종잡을 수 없는 넋두리를 했다. 아내와 헤어지고, 딸은 사립 명문대학교를 다닌다고 말하던 K의 목소리는 쓸쓸했다. 연락이 뜸하더니 K가 알코올 중독인지 암인지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K가 어떤 평지풍파와 우여곡절이 있는 삶을 겪어냈는가를 나는 세세하게 알지 못했다. 그의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잘 가시게!’란 말이 가만히 흘러나왔다.

과거는 우리 삶의 토대다. 과거의 중첩이 현재를 빚는다는 점에서 그 말은 맞다. 우리는 현재를 산다고 믿지만 그것은 과거에서 발현된 현재다. 파리8대학에서 들뢰즈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은 평론가 우노 구니이치는 ‘들뢰즈, 유동의 철학’에서 “하나의 과거는 이미 무수한 과거를 포함하고, 그 후에 도래하는 무수한 현재에 뒤덮인다”라고 쓴다. 과거가 곧바로 현재에 이르는 법은 없다. 과거 기억은 현재의 깊이 속에서 분리와 결합 운동을 하며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드러낸다. 그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차이를 만든다. 과거는 무수히 반복되고, 현재의 중첩 속에서 차이를 반복하는 가운데, 과거라는 껍데기를 벗고 현재에 도래하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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