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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가장 오래 기다린 미투, 친족성폭력 생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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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 세상에 나와

친족 성폭력 생존자 12인이 저자로 참여

"친족성폭력 피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어"

"정상가족 신화가 고통 가중…가족도 사회도 외면"

"친족성폭력 범죄 공소시효 폐지돼야"

CBS노컷뉴스 차민지 기자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지난해 친족성폭력 상담은 87건에 달했다. 이중 절반이 넘는 48건은 피해 상담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다. 그만큼 친족성폭력은 침묵을 깨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가족 내 권력관계, 가족과 친지들의 무관심과 만류도 피해자를 위축시킨다.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피해자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혼자 고통 속에 분노를 참고 있을 수 있다. CBS노컷뉴스는 절망적 상황에서 용기를 낸 피해자들의 고발에 주목했다. 이들의 목소리를 두 편에 걸쳐 싣는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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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친족성폭력 생존자 3인이 CBS노컷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푸른나비, 민지, 조제(사진=차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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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성폭력 관련 기사에는 매년 똑같은 댓글이 달려요. '천벌받아야 한다' '사형시켜야 한다' 같은 내용이죠. 그런데 정작 피해자한테는 '용서하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해요. 안쓰럽다는 감정 이상의 해결책이 없어요."(친족성폭력 생존자 푸른나비)"

피해사실을 '말하기'까지 걸린 시간만 길게는 수십 년.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사회는 친족성폭력 피해를 그저 끔찍한 일로 '소비'할 뿐 변화는 없었다. 최근 12명의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 만든 수기집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가 세상에 나온 이유도 같다.

이들은 친족성폭력 피해가 특별하고 특이한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일을 겪었지만 살아남아 묵묵하고 치열하게 일상을 살아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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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백화점 목동점 안에서 퍼포먼스를 진행중인 공폐단단(사진= 한국성폭력상담소 혜영 활동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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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수십년 만에 목소리를 내는 이유"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는 처음 푸른나비(50대 초반)가 기획했다. 푸른나비는 8살부터 10년 간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처음 피해사실을 알렸을 때 여동생은 "그건 언니가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혹여 동생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 버텨온 삶이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기분으로 피해 생존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성폭력 생존자 자조 모임 '작은 말하기'에 참여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친족성폭력 피해자는 저 하나 아니면 두 명이었는데 17년에서 18년이 되니까 참가자의 80~90%가 친족성폭력 피해자더라고요."

'이렇게 피해자가 많은데 왜 말을 할 수 없지?' 푸른나비가 처음 든 생각이었다. 사회도, 가족도 이 문제를 드러내지 않으려고만 했다. 물꼬를 터야 했다. 자조모임에서 만난 생존자들에게 책을 쓰지 않겠느냐 물었다. 하나둘 참여자가 생겼고 민지(20대 후반), 조제(30대 후반)를 비롯해 모두 12명이 참여했다.

편집인은 조제가 맡기로 했다. 지난해 7월부터 9월까지 1차로 원고를 모았다. 이후 12월까지 다시 한번 연장했다. 출간은 조금씩 늦어졌다. 가족이라는 1차 집단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경험한 이들의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원고를 내고도 내려달라는 사람, 중간에 참여한다고 했다가 빠진 사람 등이 많았다.

가이드라인은 따로 없다. 그래서 분량도, 형식도 각기 다르다. 조제는 12편 중 유일하게 만화를 그렸다. 조제의 만화에는 9살때부터 14살 때까지 이어진 '오빠 성폭력' 경험과 당시의 감정, 어머니의 2차 가해가 담담하게 그려졌다.

그는 "제 말하기의 마무리 같은 느낌으로 그렸다. 울고불고했던 처음과 달리 많이 담담해졌기 때문"이라며 "다른 생존자분들이 이 만화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지(20대 후반)는 7살 때 사촌 오빠의 성폭력을 경험한 뒤 심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한때는 커플만 봐도, 유모차에 앉아 있는 아기만 봐도 성관계에 대한 생각이 들어 구역질이 났다. 그는 책에서 "한 번도 성에 대해 배워본 적 없는 아동에게 성범죄란 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선택권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했다.

민지는 "가족들은 숨기고 싶어 하지만, 저의 피해가 숨겨야 할 일이 아니라고 저는 당당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며 "오히려 '말하기'를 통해 저의 언어나 경험이 확장되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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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안에서 퍼포먼스를 진행중인 공폐단단(사진= 한국성폭력상담소 혜영 활동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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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 신화 아래 가족도 사회도 외면했다

친족성폭력 생존자의 말하기는 힘들다. 어렵게 목소리를 낸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고 돌봐줘야 할 보호자가 가해자나 방관자가 되는 경험은 말 그대로 파괴적이다.

그 이면엔 이른바 '정상가족' 신화가 있다. 푸른나비는 "아직까지 제일 심한 욕이 부모 욕"이라며 "그만큼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건드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로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피해 사실을 알리려고 해도 가족들이 말리는 경우도 많다. 민지는 "(친족성폭력 피해를 밖으로 알리면) 자신의 안위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12개의 에세이에는 공통적으로 가족의 2차 가해 경험이 드러난다. 민지는 19살 때 처음 어머니에게 피해를 말했다. "인제 와서 어떻게 하느냐. 잊어버리라"는 말을 들었다. 조제의 어머니는 26살의 그녀에게 "미친 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사회 역시 친족성폭력 생존자의 말하기를 터부시한다. 푸른나비는 "이 사회는 안전하고 싶기 때문에 피해 생존자들을 밀어내려고 한다"며 "가정이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이 커지기 싫은 것"이라고 말했다. 힘들게 공론화가 되더라도 저런 가정이 얼마나 되겠냐며 축소되거나, 단편적인 분노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남자는 늑대. 아버지만 믿으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희한테는 그런 말이 안 통하거든요. 계부가 아니라 친아버지가 가해자인 경우가 더 많아요. 오빠가 가해자라고 하면, 이제 내 자식들을 의심해야 하는 거예요. 성교육 시간에 낯선사람을 조심하라고 해야 하는데 친척을 조심해라, 아버지를 조심하라고 하면 얼마나 무서워요?"(푸른나비)

2018년 불어닥친 미투의 흐름에서도 친족성폭력은 사각지대였다. 말하는 사람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미투가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낼 때도, 친족성폭력의 벽은 공고했다.

민지는 "그동안은 친족성폭력 문제는 남들도 듣기 불편해하는 일로 치부돼왔다"며 "정상적이진 않지만, 이런 일은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조제는 "그래서 책을 쓰게 됐다"며 "사람들이 끔찍하다고, 감당이 안 된다고 피하려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런 일을 겪고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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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의 크라우드 펀딩이 마감됐다 (사진=텀블벅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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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를 넘어 '공소시효' 폐지까지"

말하기는 종착점이 아니다. 생존자들은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경제적 지원 등의 문제 해결을 바라며 다양한 연대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2년 개정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13살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앴다. 하지만 2011년 이전 사건은 소급적용되지 않는다. 피해 당시 나이가 13살 이상이어도 적용되지 않는다.

생존자들은 친족성폭력이라는 범죄의 특성을 고려할 때, 공소시효는 폐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친족 성범죄 공소시효 폐지를 청원합니다!'라는 국민청원을 올렸던 푸른나비는 "친족성폭력 피해는 대부분 어렸을 때 경험한다. '이거는 놀이야. 말하면 안 돼'라고 회유나 협박을 당한다"며 "이후 성인이 되어 문제를 알게됐을 때 공소시효가 지나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친족성폭력 피해자의 55.2%는 첫 상담을 받기까지 10년 넘게 걸렸다.

푸른나비와 민지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지난달 진행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온라인 전시 '시간을 거스르다'에 참여했다. 조제도 이들과 함께 '공폐단단'(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모임)에서 활동한다.

심리치료와 경제적 지원도 필요하다. 조제는 "우울증과 트라우마로 정규직으로 일을 하기가 힘들었다"며 "아르바이트로 일하면서 생활비와 월세를 제외하고는 심리상담에 돈을 쓰느라 아등바등 살았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두 가지가 맞물려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수기집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2012년 아버지의 성폭력을 고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김영서씨도 이들과 연대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김영서씨는 "가해자가 벌을 받는다는 건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치유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준다는 뜻"이라며 "가해자가 피해자의 삶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사회가 확보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 벌어진 범죄는 좀 다르게 접근해줘야 한다"며 "암수범죄라고 하는 만큼 친족성폭력 징후를 제3자가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는 목표치의 638%인 1200여만원 모금에 성공했다. 명아, 민지, 미카, 불가살이, 에버그린, 엘브로떼, 정인, 조제, 최예원, 평화, 푸른 나비, 희망 12명이 공동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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