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만난 단색화 거장 박서보·박승숙 부녀. 딸이 얼굴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아버지가 웃는다. [이충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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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그림 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싫었다.
미술치료사 박승숙 씨(53)는 이기적인 아버지이자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90)에게 받은 상처가 많아서 결혼 후에 되도록 멀리 했다.
그런데 2018년 가을 박 화백이 고혈당으로 쓰러졌다. '돌아가시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자 아버지 곁으로 가게 됐다. 몸이 불편한 박 화백이 구술하는 각종 인터뷰 답변을 받아적고 정리하면서 아버지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박 화백을 바라보게 됐고 그간 쌓인 오해가 많이 풀렸다.
두 달간 딸이 매일 아버지의 인생과 예술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책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인물과사상사 출간)를 펴냈다. 책을 쓰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딸은 최근 영역본을 전세계 온라인에 무료 공개했다. 그 이유를 묻자 딸은 "수익을 원하는게 아니라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는게 목적이다"고 답했다.
서울 연희동 박 화백의 기지(작업실·전시장·자택 건물)에서 만난 부녀는 책을 통해 거리를 좁힌 듯했다. 사진 촬영 때 딸이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아버지의 굳은 얼굴을 살짝 건드려 빙그레 미소짓게 만들었다.
박 화백은 "누구보다 내 상황을 잘 알고 글재주가 있어 책을 잘 썼다. 엊그제 이우환(추상화 거장)이 전화를 걸어 '심리학을 전공해서 고도하게 쉽게 쓰면서도 할 소리를 다 했다'고 칭찬하더라"고 흡족해했다.
박서보 2019년작 묘법(描法) No. 190227(130x170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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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우환을 비롯해 최근 세상을 떠난 '물방울 화가' 김창열, 추상화 대가 윤형근 등 오랜 지기, 스승이었던 김환기와 이응노 등 한국 현대미술사 주역들과 인연을 깊이 다뤘다. 특히 힘든 시절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밀어주고 끌어주던 김창열과 우정이 눈길을 끈다.
딸은 "아버지가 끝까지 척지지 않고 좋게 기억하는 친구가 김창열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박 화백은 "창열이 유언 대로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나무 아래 모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제주도에 가는 걸 원치 않았다. 창열이 평창동 자택을 종로구립미술관으로 만드는데 거기에 묻혔으면 좋았을 텐데···. 평생 그림을 그린 곳이잖아"라고 아쉬워했다.
책은 경북 예천군에 태어난 박 화백의 유년시절부터 시작된다. 홍익대 미대에 입학한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고 부친마저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한 후 가난과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들이 눈물겹다. 피난중에 목숨을 잃을 고비를 여러차례 넘긴 그는 친척과 친구들 집을 전전하면서도 그림을 중단하지 않았다.
딸은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가난했던 적이 없다고 오해하는데 흙수저였다. 명품을 두르고 홍콩 경매에서 그림 가격이 폭등한 화가로만 안다"고 지적했다. 홍익대 미대 학장을 지냈지만 호황기에도 3000만원에 팔렸던 박 화백의 그림은 2014년 단색화 열풍이 불면서 경매 낙찰가 10억원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 최고 경매가는 약 23억원(묘법 NO. 37-75-76)으로 한국 생존작가 3위에 올라 있다.
딸이 "아버지 성격을 만든 것은 한국전쟁"이라고 했을 정도로 박 화백은 혹독한 시련을 견디면서 강해졌다. 불굴 의지로 독창적인 작품과 소신을 밀어부치는 힘이 되기도 했지만, 자기 주장이 강해 주변인들과 부딪히기도 했다.
박 화백은 "어렸을 때 너무 약하고 잘 울어서 친구들이 '요아이 무시(약한 벌레를 뜻하는 일본어)'라고 놀렸다. 전쟁이라는게 없었더라면 지금의 박서보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서보 2019년작 묘법(描法) No. 190411(130x200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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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연필로 선을 그리고 흰색 물감으로 지우기를 반복하는 1970년대 '초기 묘법', 물에 불린 한지를 캔버스에 붙여 연필이나 뾰족한 것으로 선을 그어 오욕칠정을 버리는 '후기 묘법' 등 수신(修身)의 미학을 펼쳐왔다.
79세에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조수의 힘을 빌리는 아버지가 "수신도 대리행위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자 딸은 "노구로 더는 작업을 하기 힘들어서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렸다고 그냥 인정하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딸은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가 비판받는 부분, 모순을 알게 됐다. 그 구멍을 메워드리려고 길게 대화한 날이 있었는데 울컥 했다"고 털어놨다.
마음에 드는 작가들만을 챙겨줘 '박서보 사단'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책에 다뤘다. 서울대와 홍대 미대의 치열했던 경쟁도 드러난다.
딸이 "당신을 잘 따르고 찜한 사람을 밀어주는 성향이 있다"고 지적하자 박 화백은 "서울대 미대 출신 작가들이 나를 견제했지만 나는 도왔다. 폭이 넓은 사람이다"고 부인했다.
딸은 지금도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작업실로 향하는 아버지를 '권태를 모르는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박 화백은 2019년 연필로 그린 신작 '묘법' 2점을 완성해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에 걸었다. 이 신작 2점에 대해 딸은 "앉고 일어서는 것도 힘든 노화백의 인간승리"라고 했다. 박 화백은 "지팡이를 짚어도 어지러워서 자빠진다. 손발에 쥐가 나서 잘 못 그리지만 1년에 1점 완성해도 좋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제 박 화백의 관심은 박서보미술관을 3곳 지어 소장 작품들을 모두 기부하는데 있다. 고향인 예천군이 제안한 미술관 설계를 세계적인 건축가 페터 춤토어에 맡기고 싶어 편지를 보냈다.
박 화백은 "춤토어가 내 작품세계가 궁금해 서울에 오겠다고 약속했다. 아시아에 춤토어 미술관이 없어 짓게 된다면 명소가 될 것이다. 종로구에서도 대지를 제공하면서 내 미술관을 지으라고 했다. 작품을 팔아서 건립비 60억원을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딸은 "미술관은 아버지 수명 연장용이다. 일이 있으면 저렇게 눈이 반짝거린다"고 말했다.
박 화백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다. 어렸을 때 어찌나 이쁜지 오드리 햅펀 같았다. 애 엄마가 목욕시킬 때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고 하자 딸은 "동네방네 누드 사진을 보여줘 어린 나이에 상처받았다"고 눈을 흘긴다.
미술관 건립 외에도 박 화백의 마음은 바쁘다. 오는 3월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올 가을에는 정원에 매화를 심을 계획도 세워놨다. 내년초 눈 속에 피는 설중매를 기대하면서.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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