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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때리던 아빠 다시 본 아이, 소변 지렸다…폭력의 면접교섭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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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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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에 대한 수사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왜 아이를 아빠에게 보여주지 않나요?” 지난해 7월 한 가정법원의 조정위원이 남편으로부터 3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이혼을 결심한 박모(28)씨에게 한 말이다. 박씨는 20개월 된 자녀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고 폭언을 일삼은 남편을 경찰에 신고한 상황이었다. 박씨는 “보복이 두려워 아이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거처를 옮겨 이혼 조정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면접교섭권을 이유로 남편에게 아이를 보여줘야 한다고 해서 너무 당혹스러웠다”고 회고했다.



‘분리조치’의 사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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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모의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사망한 정인 양이 안치된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추모 메시지와 꽃들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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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월 입양아 정인이의 죽음을 막지 못한 뼈아픈 실책 중 하나로 지목된 것은 ‘분리조치’였다. 세 차례의 기회가 있었지만, 정인이는 학대를 일삼던 양부모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끝내 숨졌다. 정인이 사건을 계기로 분리조치의 중요성이 부각됐지만, 여전히 사각지대가 있다. 앞서 박씨의 경우처럼 ‘면접교섭권’이 적용되는 이혼 과정에서는 분리조치의 필요성이 간과되는 게 현실이다.

면접교섭권은 부모 중 자녀를 직접 양육하지 않는 비(非)양육자가 자녀와 면접·접촉할 수 있는 민법상 권리다. 부모의 권리인 동시에 자녀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권리가 가해 부모와 피해 자녀의 분리를 무력화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의 판단에 따라 부모의 폭력을 당한 아이가 부모를 강제로 만나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해 부모와 만나야 하는 아이들



지난 2018년 10월 한 가정법원은 부인과 어린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편에게 자녀면접교섭 사전처분 결정을 내렸다. 이혼 절차가 진행 중일 때 남편이 자녀를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당시 부인과 아이는 남편을 피해 보호시설에서 거주 중이었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아버지를 만난 아이는 야뇨 증세와 불안 증세가 악화했다.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지난해 12월 국회입법조사처는 실태 조사를 통해 자녀에게 폭력을 저지른 가해 부모에게도 자녀면접교섭권이 부여되는 상황에 우려를 표했다. 입법조사처는 “이혼 과정에서 수반되는 부부 상담 명령, 자녀면접교섭권 사전처분 등에 의해 가정폭력 피해자와 자녀가 위협받는 사례가 있다”며 “가정폭력 피해가정의 자녀를 면접교섭 대상자에서 배제하는 대책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녀의 복리’를 어떻게 판단하나



현행법상 자녀면접교섭의 제한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민법은 자녀면접교섭의 제한·배제·변경 사유로 ‘자(子)의 복리’를 명시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민법에 명시된 ‘자녀의 복리를 위해’라는 표현은 매우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며 “가정폭력을 경미한 사안으로 여기는 조정위원이나 가사조사관을 만날 경우 피해자의 상황이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아동학대 혐의로 수사가 진행 중인 남편과 자녀면접교섭권을 두고 다투고 있는 박씨는 “조정위원회와 조정위원들은 가정폭력 피해가 있든 아동학대 사실이 있든 무조건 원만하게 해결하려고만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는 게 아닌 같은 공간에 두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자녀면접교섭을 제한하기는 쉽지 않다. 피해자가 가정폭력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현혜 변호사(법률사무소 소원)는 “가정에서 이뤄지는 배우자의 폭력과 자녀에 대한 학대 행위에 대한 증거를 미리 확보해놓기란 쉽지 않다”며 “법원에서는 실제로 (학대 등에 대한) 형사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이상 가정폭력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면접교섭권 제한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정폭력 부모 면접권 제한해야”



국회는 정인이 사건을 계기로 뒤늦게 관련 제도 개선에 나섰다. 지난 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가정폭력 가해자의 자녀면접교섭권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 가사소송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에는 법원이 자녀면접교섭 사전처분을 할 때는 반드시 가정폭력 피해 자녀의 보호조치 등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김 의원은 “부모의 이혼 과정 중에 아동학대 등 가정폭력 전력이 있는 부모에게도 자녀면접교섭권이 부여되는 것은 피해 아동에 대한 2차 가해와 치명적인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위험성이 크다”며 “가정폭력의 직·간접 피해자인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가정폭력 가해자의 자녀면접교섭권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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