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넷, 19일 1심 무죄 관련 전문가 기자회견 개최
"업체들 범행 의도·행적 안 따지고 인과관계 곡해"
과학과 법의 영역 혼동한 '갈릴레오 시대 판결' 우려
전문가 증인으로 참여했던 연구자들은 재판부가 과학적 인과관계의 논리를 잘못 이해해 사실을 왜곡한 판단을 내렸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형사사건 판결에서 엄격한 인과관계가 중요하지만, 불확실성을 입증하는 게 과학자들의 역할인데 100%의 무결점 연구 결과만을 사실로 보고 입증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은 항소심에서는 엄격한 인과관계 입증의 대상이 물질과 건강 피해가 아닌 피고의 범행의도와 행적에 맞춰져 1심처럼 과학 영역이 사법화되는 ‘갈릴레오 시대의 판결’과 같은 오류가 나오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法 가습기 살균제 무죄…“연구결과 잘못 이해”
가습기 살균제 관련 전문가 기자회견이 19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진행하고 있다.(사진=이소현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국환경보건학회는 19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가습기넷이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를 마음껏 흡입하게 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 이번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심에서 합리적이고 공정한 판결이 다시 이뤄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이 재판에 출석해 증언하는 경우는 빈번하지만 재판부의 판결이 잘못됐다며 공개적으로 반박 입장을 밝히는 것은 이례적인 행보다.
앞서 지난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유영근)는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등 가습기 살균제 제조·유통 업체 관계자 전원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무죄로 선고했다. ‘가습기 살균제의 주요 성분(CMIT·MIT)이 폐 손상을 일으킨다는 과학적 입증이 부족하기 때문에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검찰은 지난 18일 1심 무죄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전문가들은 문제가 된 제품 사용과 폐질환 발생의 인과성을 인정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판결 대상’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학회는 “피고는 CMIT·MIT를 가습기 살균제로 사용하면 인체 피해가 우려됨을 사전에 인지했고 안전성 확인 의무를 회피했지만, 1심 결과는 무죄였다”며 “이번 재판의 판결 대상은 기업의 위법 행위와 피고의 잘못이었어야 했는데, CMIT·MIT의 질환 발생 입증에 대한 과학의 한계로 바뀐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의 증언을 원래 발언 취지와 다르게 인용하거나 선별한 점도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여러 부분에서 특정 시험들을 언급하면서 “CMIT·MIT가 폐 내 염증 및 섬유화가 관찰되지 않았다”며 “연구책임자도 CMIT·MIT는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달리 폐섬유화와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게 맞다고 진술했다”고 적시했다.
재판 증언에 참여한 이규홍 안전성평가연구소 박사는 “심문과 증언 전후를 빼고 이 증언 부분만 보면 누구나 ‘물질과 폐섬유화의 관계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며 “이 심문은 해당 연구결과로 한정해서 인과관계가 성립하는가 물어보는 것이었고, 해당 연구결과로만은 관련 없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재판부가 특정 발언만을 한정해 관련이 없다는 취지로 증언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얘기다.
피해자 조사에 참여한 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피해자들을 뭉뚱그려 ‘기저질환이 있다’는 식으로 가습기 살균제의 (폐질환) 인과관계를 무시해 사실을 왜곡한 판결”이라며 “서너 살 아이들이 나이가 있어야 걸리는 폐질환을 얻은 이유를 따로 설명할 수 없음에도 개인 인과를 완전히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 단정적 결론 내리지 않아”…무결점 ‘입증’ 어려워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 비상대책위 등이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진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직 임원들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자 사법부를 규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또 과학의 영역과 법적 판단의 영역을 구별해야 하지만, 재판부가 이를 혼동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자신들의 실험결과를 가지고 CMIT·MIT 성분과 이 사건 폐 질환에 따른 사망 내지 상해 혹은 천식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 는 취지의 진술을 하지는 못했다”고 적시했다.
이 박사는 “CMIT·MIT와 피해질환과의 인과성 규명은 어느 하나의 실험결과로 얻어온 것이 아니다”며 “이를 단정적으로 증언하지 못한다고해 판단에 배제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학회도 “세상 어떤 과학자도 결정론적으로 A가 B로 말미암았다고 주장하지 않고, 그것은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며 “전문가는 학문적 역량과 견해에 따라 판단을 의견서로 제시하고, 이를 형사재판에 받아들일지에 대한 판단은 판사의 영역”이라고 비판했다.
피해자가 존재함에도 동물실험 결과를 중요한 근거로 삼은 것도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동물실험은 옵션일 뿐 독성이 동물실험에서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며 “기적의 살충제라며 노벨상까지 받은 DDT(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와 탈리도마이드 등 동물실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독성도 많다”고 반박했다.
의약외품용 보존제와 세정제에 사용되는 CMIT·MIT의 위해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재판부 결론에도 반기를 들었다.
이종현 EH R&C 환경보건안전연구소 소장은 “오히려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던 CMIT·MIT를 가습기 살균제 용도로 사용하면서 제품안전에 대한 점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사용했다는 것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며 “위해하고 하자가 있는 제품이기 때문에 더는 시장에 출시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00% 진실, 확실성 등 단정적 표현을 피하는 과학자의 일반적인 태도를 1심 재판부가 해석하는 데 서툴렀다며, 2심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을 촉구했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는 “이 사건은 과학에 의존해 재판한 전례 없는 사법 과정”이라며 “과학의 진실 추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무결점만 진실로 인정한다면 사실 대부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2심 재판부는 물질과 피해 간의 인과관계를 엄격히 입증하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 증명 정도를 낮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며 “과학자로 구성된 자문패널을 구성할 필요성도 있다”고 제안했다.
한편, 환경부 산하 가습기 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지난 15일 기준으로 총 7183명이며, 이중 사망자는 1613명이다.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