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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詩想과 세상]스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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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얇은 솜 위에 올려둔 콩이

물을 머금더니 발이 튀어나오고

햇빛 닮은 쉼표 하나 찍어준다

초 단위로 살아서

사방으로 뻗어가려고

가녀린 침묵을 세운다

연두로 물들이는 세상 아래

촉촉한 스펀지가 울고 있다

콩 한 알이 울어야 할 슬픔을

모두 뱉어내고

거룩한 울음 앞에

우두커니 서서

쉼표로 돋아난 발자국을

꼼지락거린다

권지영(1974~)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니는 아이의 숙제일 것이다. 강낭콩에 싹을 틔우고, 화분에 옮겨심어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때까지 관찰일기를 쓰는.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물 머금은 종이행주 위에서 발아의 순간을, 단단히 웅크리고 있던 생명이 싹트는 것을 아이와 함께 오래 지켜보았다.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지켜볼 것이다. 시인은 생명이 탄생하는 숭고한 시간에서 “초 단위로 살아”야 하는 삶의 절박과 “가녀린 침묵”을 본다.

쉼표가 꼼지락거리는 사이 얇은 솜은 “연두로 물”든다. 콩의 양분으로 싹이 자란다. 어린 생명은 부모의 희생을 요구하고, 부모는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다. 그런 “거룩한 울음”이 있기에 생명이 태어나고 성장한다. 대(代)를 잇는다. 생명은 한꺼번에 자라지 않는다. 서서히 자라고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다. 혼자 성장한 줄 알지만 물과 햇빛, 정성스러운 손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조만간 “쉼표로 돋아난 발자국”을 화분에 옮겨심어야 하리라.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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