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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비열남·순둥이는 잊어라… 송전탑 전기공으로 변신한 오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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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개봉하는 저예산 독립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팩소주에 빨대를 꽂고 홀짝이면서 한낮의 거리를 걸어가는 사무직 여직원 ‘정은(유다인)’. 롱코트 차림에 여행 가방을 끌고 가다가 무심코 팩을 구겨 던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28일 개봉하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감독 이태겸)는 도입 장면부터 인상적인 저예산 독립영화다.

정은은 7년간 근무한 회사에서 해고 위기에 내몰리다가 하청업체 파견 명령을 받았다. 1년만 버티면 본사로 복귀할 것이라는 약속을 듣고 유리창에 빨간 펜으로 1부터 365까지 차례로 숫자를 적어 나간다. 하나씩 지우면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조선일보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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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대사 없이 상황 묘사와 동작만으로 등장 인물들의 처지와 고민까지 드러내는 연출력이 남다르다. 영화는 고용 문제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지만, 욕설이나 감정 과잉으로 치닫지 않고도 이야기를 전달할 줄 안다. 관객보다도 먼저 흥분하는 ‘분노 상업주의’가 넘쳤던 한국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미덕이다.

외딴섬으로 전기를 보내는 거대한 송전탑에 올라가 정비하는 하청 현장. 칼바람에 휘청이는 34만 볼트의 고압 전선에서 목숨을 내걸고 작업하는 ‘막내’ 직원 역할을 배우 오정세가 맡았다. ‘막내'는 박봉으로는 세 딸을 키우기 벅차서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거나 대리 운전을 뛴다.

드라마 ‘스토브리그’ ‘동백꽃 필 무렵’ 등 오정세는 최근 출연작마다 연타석 홈런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의 연기력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크다. “우리 같은 사람은 두 번 죽는 거 알아요? 한 번은 전기구이, 한 번은 낙하. 근데 우리가 무서운 건 그게 아니라 해고예요.” 힘을 쏙 뺀 대사 처리로 세상에 짓눌린 중년 가장의 남루한 처지까지 그대로 드러낸다. 비열한 악역과 순정파 순둥이 외에도 그의 다채로운 ‘연기 구질’을 실감할 수 있다. 실제 배우들은 촬영을 위해 송전탑에 오르는 훈련을 받기도 했다.

영화에는 약점도 적지 않다. 후반으로 갈수록 선악의 도식적 이분법에 빠져든다. 주인공의 인간적 사연이 불충분하다 보니, 결말에서 든든한 뒷심이 실리지 않는 아쉬움도 남는다. 하지만 본사와 하청 업체, 사무직과 육체 노동, 남녀 직원이라는 복잡한 갈등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할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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